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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신언서판(身言書判)과 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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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6-02 22:36:55 수정 : 2023-06-02 22:3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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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선생님한테 들은 말 한마디가 평생 기억에 남을 수 있다. 대학 1학년 교양국어 수업시간에 들은 소설가 정한숙 교수의 말이 그렇다. “대학원에 가려면 첫째 돈, 둘째 체력, 셋째 머리가 필요하다.” 대학원 공부에 실력이 최고라고 여긴 순진한 믿음을 여지없이 깨뜨려준 ‘잔인한 진실’이었다. 졸업 후 진로 계획 목록에서 대학원 진학을 일찌감치 삭제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칠판에 큼지막하게 한자로 적은 네 글자도 똑똑히 기억한다. 노트 필기를 바른 글씨로 하라는 뜻에서 적어준 ‘身言書判(신언서판)’. 풍채와 말, 글, 판단이다. 중국 당서(唐書)의 ‘선거지(選擧志)’에 따르면 풍채가 늠름하고, 말이 분명하고 반듯하며, 글씨가 정확하고 아름다우며, 사리분별이 뛰어난 인물을 등용해야 한다. 갓 쓰고 도포 입던 시절의 구닥다리 기준으로 치부할 것만은 아니다. 잘생기고 말 잘하는 이들이 정치권에서, 연예계에서 잘나가지 않는가.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하는 정치인들 보면 판단도 아주 잘해야 하고.

‘서’야말로 진부한 덕목인 듯하다. 요즘은 문서 작성을 대부분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서 하는 시대다. 아예 말만 하면 알아서 척척 글을 써주는 앱까지 있다. 용불용설(用不用說)에 따라 글쓰기도 퇴화하는 법. 요즘 학생들 글씨는 읽기조차 힘든 악필이 많다.

필적학 전문가인 구본진(58) 변호사는 좋은 글씨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는 책까지 펴냈다. 15년간 세계 2000여명의 글씨를 연구해 내린 결론이다. 글씨에는 그 사람의 내면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서예로써 인격수양을 했듯 글씨로 내면을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한 고교에서 올해부터 1학년생을 대상으로 한글 쓰기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일지라도 글씨는 개성을 표현하고 소통에 중요한 수단이라는 판단에서다. 어떤 문장을 눈으로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글로 써보면 기억에 오래 남고 사고력이 길러진다. 볼펜과 연필을 꾹꾹 눌러 가면서 얻을 인내심은 덤이다. 글쓰기는 학생들 인생을 바꾼 좋은 기억으로 평생 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박희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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