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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불화 온상 된 익명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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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6-02 22:36:44 수정 : 2023-06-02 22:3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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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으로 커뮤니티에 글 쓰는 것까지 어떻게 막겠습니까.”

여경에 대한 혐오·조롱글이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경찰청 블라인드와 관련해 한 경찰 중간간부가 한 말이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체념과 냉소가 배어난 어투였다. 블라인드는 익명으로 회사 사람들끼리만 소통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다. 여기에 글을 올리지 마라고 할 수도 없고 무슨 대책이 있겠냐는 반문이 이어졌다.

정지혜 사회부 기자

그의 말대로 “일부 일탈적인 1∼2명이 문제적 글을 올리는 것일 뿐 대부분 남녀 경찰관은 잘 지낸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럴수록 블라인드가 야기하는 불화와 사기 저하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이 된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논란될 글이 또 올라올까, 외부로 유출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알려진 경찰청 블라인드발 논란만 여럿이다. 그중 하나가 지난달 초 혼성기동대에서 여경 4명이 전출된 사건으로, 남녀 경찰관 갈등이 불거진 주요 통로가 바로 블라인드였다. 기동대 여성 경찰들이 건물 미화를 맡은 주무관들에게 바뀐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갑질’을 했다고 쓴 남성 경찰의 글이 시작이었다.

감찰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은 오히려 더 커졌다. 같이 일하는 이들이 작성했다는 것을 아는 과도한 비난과 악성 댓글이 이미 팀워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낸 뒤였고, 의혹 제기가 사실 무근으로 밝혀지고도 외부 남초 커뮤니티에서의 ‘여경 무용론’은 더 거세질 뿐이었다. 갑질 누명을 쓴 여경들이 병가를 쓰고 놀러갔다는 등의 거짓 루머까지 유포됐다.

블라인드, 에브리타임(대학교 익명 커뮤니티) 같은 폐쇄적 플랫폼에서의 동료 공격 문화는 당하는 사람의 고립감과 고통을 갑절로 만든다. 익명 뒤에 숨어 동료를 욕하는 가해자의 비겁함은 조직 사람들 ‘모두가 보는 공간’에서의 저격으로 극대화된다. 당사자 앞에서 앞담화할 자신은 없으면서 그냥 뒷담화는커녕 ‘피해자가 보고 더 힘들어하라고’ 올리는 것이 커뮤니티 저격글이기에 가장 악질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언제부터인가 익명 커뮤니티는 조직 불화와 갈등의 온상으로 등극했다. 권력에 대한 내부고발, 힘 없는 이들이 익명의 힘이라도 빌려 문제를 공론화하는 등 순기능보다 동료 간 분쟁과 감시, 사내정치 및 물 흐리기 등 역기능이 두드러지는 실정이다. 이곳에서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싸울 무기를 얻어 힘의 균형을 맞춰 보려는 디지털 민주주의는 장려되기보다 짓밟히고 있다.

경찰청 블라인드가 실은 사회의 축소판 같기도 해 한 번 더 씁쓸해졌다. 경찰 조직에선 여전히 소수이고 상대적 약자인 여경이 더 쉽게 타깃이 되듯 바깥에서도 비슷한 일들은 일어나고 있고, 익명성이 강조되는 온라인에서 이는 더욱 일상적이다.

만만하고 세력화되지 않은 약자를 더 쉽게 때리고 타격감을 느끼는 통로로 전락한 온라인 커뮤니티, 익명성의 폐해를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볼 때다. 엄밀히는 온라인이나 커뮤니티의 문제라기보다 이용자의 문제일 것이다. 약자의 연대가 온라인에서조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에 우리 사회가 속수무책 손 놓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정지혜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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