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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경의 전설’ 박미옥 前 경정 “이젠 자유인… 30년 수사 현장 소회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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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5-21 20:00:00 수정 : 2023-05-22 13:5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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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강력계 형사 된후 초고속 승진
당시 온갖 성차별에도 꼿꼿 응대
신창원 검거 등 굵직한 사건 담당
2년 전 사직… 제주에서 제2인생
형사시절 이야기 에세이도 펴내

“안녕하십니까! 박 형사님, 미용실 잡지에서 봤습니다.”

 

907일간 대한민국 형사들을 농락하며 탈주극을 벌이다 붙잡힌 신창원이 여형사를 보자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영웅 행세를 하며 팬클럽까지 거느렸던 신창원이 저지른 강간사건을 파헤친 형사였다. 신창원이 도주하며 머리 스타일을 자주 바꿔 미용실을 이 잡듯이 탐문했는데, 신창원도 미용실에서 그에 관한 잡지 기사를 읽었던 것이다. 

 

‘여경의 전설’이라 불리는 박미옥 전 경정은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으로 만삭 의사 부인 살인사건과 숭례문 방화사건, 필리핀 납치 암매장 사건을 꼽았다. 남정탁 기자

국내 최초 여성 강력계장, 최초 여성 강력반장 등을 지낸 ‘여경 전설’ 박미옥(55)이다. 1987년 19살에 순경으로 입직해 1991년 ‘여자형사기동대’가 창설되던 해 최초 강력계 형사가 된 후 경장(1992년)·경사(1996년)·경위(2000년) 특진을 거듭했다. 보통 20년 걸리는 순경에서 경위까지 9년 만에 초고속 승진한 것이다.

 

신창원 검거 특별팀에 투입됐을 때만 해도 동료에게 “웬 냄비(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은어)가 왔냐”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주전자는 가만히 계시죠”라고 응수했고, 신창원 검거에 기여한 공로로 경위로 특진했다. 박 전 경정을 지난 16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무슨 일만 하면 “어디 여자가∼” 소리부터 듣던 때죠. 그런데 피해자는 ‘담당 형사님, 저 어떡해요”라며 매달렸고, 제가 구속한 사람의 인생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다른 것 신경 쓸 새 없이 형사의 무게가 크게 느껴졌습니다.”

 

2008년 2월 숭례문 방화 현장 화재감식을 지휘하는 모습을 화재감식팀 후배들이 액자로 만들어 건네줬다. 이야기장수 제공  

신창원 사건뿐 아니라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만삭 의사 부인 살해 사건, 한강 변 여중생 살인 사건, 숭례문 방화사건 화재감식 등 대한민국을 뒤흔든 사건들에 형사 박미옥이 있었다. 범죄 재연극 ‘경찰청 사람들’에 여형사가 등장하는 사건은 모두 그가 담당했던 사건들이었고, 드라마 ’시그널’, ‘괴물’, ‘히트’,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등 수많은 작품의 자문을 맡았으며 극의 모티브가 됐다.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기록이었지만 2021년 2월 돌연 사표를 던졌다. 

 

“관리자가 되니 점점 후배들이 사건 해결해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지고, 형사과장으로서 보탤 게 언론을 대하는 세련미밖에 없더군요. 점점 죽어가는 것 같았죠.”

 

서귀포 형사과장을 끝으로 경찰 생활을 마감한 그는 제주에 후배와 한 마당에 각자의 집을 짓고 한쪽에는 책방을 열었다. 범죄현장이 아닌 일상에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2019년부터 4년간 매년 1000만원어치 넘게 책을 구입해 총 3000권이 넘는다. 주로 철학, 여행, 정신분석, 감정·관계에 관한 책들이다.

 

“훈련만으로 체력이 부족한 듯해서 한의원에 갔더니 ‘사람을 만나라’고 하더군요. 보통 사람을. 범죄현장에서만 사람을 만나 제 몸에 긴장도가 너무 높아 온몸이 굳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책방을 열었지만 과연 사람들이 전직 경찰과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때 서명숙 제주 올레 이사장이 책을 소통의 도구로 써보라고 제안했다.

 

“누군가에겐 비극이자, 고통인 사건 이야기를 절대 책으로 내지 않겠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아니라 어떤 사람, 어느 삶 앞에서 내가 주저하고 두려워했는지, 내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사 박미옥’(이야기장수 출판)은 그렇게 나온 책이다. 33년 경찰 생활 중 30년을 강력계에 몸담은 형사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뿐 아니라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은 사건 현장에서 느낀 소회를 담았다. 에세이이지만, 범죄 단편소설 읽는 듯한 속도감과 사건 이면에 숨어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사연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녹아 있다. 

 

책 중 한 구절. (대낮 아파트 화단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범죄 증거를 보존하기 위해 범인이 입 안에 남긴 정액을 물고 2㎞를 걸어 경찰서까지 온 여대생에게, 그리고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는 경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인 듯 하다) 

 

‘때로 삶은 더럽고 비루한 방식으로 우리의 따귀를 치지만, 옳은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근본적으로 훼손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딛고 끝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는 책방 운영을 위해 커피콩을 볶고, 설치미술 작가 윤정원의 어시스트도 하고 있다. 

 

1991년 대한민국 최초 ‘여자형사기동대’가 창설되며 23세에 최초 강력계 여형사가 된 후 사격 훈련을 받고 있는 박미옥. 이야기장수 제공

“우연한 기회에 윤 작가 일을 돕게 됐는데 열여섯 시간 동안 작업하면서 엄청난 몰입을 경험했어요. 사회 초년생처럼 다른 세계에서 다른 감정을 느끼며 경찰의 단어에서 좀 더 확장된 언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뷰 중 사건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다시 눈을 반짝였고, 신이 나 보이기까지 했다. 인천 층간소음 난동사건의 여경 대처 논란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6개월 된 ‘여경’이 피해자를 못 구했다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엄청난 실수이고 직업적으로 야단맞아도 부족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는 신임도, 남녀도 없습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건 우리가 고민한 시스템이 존재하는가, 그 시스템을 운영할 사람을 제대로 훈련시키고 있는가 입니다.”

 

2002년 양천경찰서 최초 여성 마약범죄수사팀장 재직 시절 K2 소총 사격 훈련 모습. 이야기장수 제공

롤모델도 없이 30년 넘게 지켜온 범죄 현장을 미련 없이 떠났지만, 사람들은 ‘형사 박미옥’의 길을 아쉬워했다. 떠나면서 그는 여경 후배들에게 말했다.

 

“길 인 줄도 모르고 들어섰다가 오솔길, 등산로까지는 만든 것 같다. 정상에 올라설지, 신작로를 내고 달릴지는 이제 너희들이 해라. 그리고 한잔하고 싶고 울고 싶으면 와라.”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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