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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갤러리’ 사태와 여성 착취 사회의 민낯 [정지혜의 빨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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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5-01 00:55:19 수정 : 2023-05-01 00: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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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우울한 여성’이 필요한 사회 같아요.”

 

여성 우울증에 대해 쓴 훌륭한 책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하미나 지음, 동아시아)을 읽고 심리학 전문가와 이야기하던 중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우울증을 앓는 20∼30대 한국 여성 31명을 인터뷰해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으로서 여성 우울증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정신의학과를 찾아 우울증 진단을 받은 책 속 여성들의 사례는 그동안 한국 사회가 이들의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취급해 왔다는 지표 자체로도 유용하지만, 한편으로 더 큰 경각심을 일으켰다. 진단만 받지 않았을뿐 크고 작은 우울감에 시달리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겠다는 생각, 이들의 정신적 취약성을 너무 좋은 먹잇감 삼는 ‘여성 착취 사회’의 단면이 그것이다.

 

폭력성으로 악명 높은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그 중에도 가장 답 없는 게시판으로 여겨지는 ‘우울증 갤러리’의 여성 착취 사례는 이런 유형의 극단 버전이다. 몸과 마음이 힘든 여성은 ‘조금만 잘해줘도 쉽게 넘어온다’는 식의 수사가 통하는 이곳에는 이들을 어떻게 해 보려는 ‘가짜 우울증 남성’들이 넘쳐난다. 복수의 경험자 증언에 따르면 이런 남성들과 연애와 성착취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피해를 당하는 여성들은 점점 더 깊은 무력감과 자포자기에 빠져들고, 일부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이를 우울증 갤러리만의 문제로 보는 건 순진한 시각이다. 취약한 상태에 놓인 여성을 상대로 교제폭력·살인, 가스라이팅(심리 조종)·그루밍 성범죄 등을 저지르는 사건은 더 이상 사회면 뉴스에서 놀라운 기사도 아니다. 우울증 갤러리 사건에서처럼 이런 여성을 착취하는 현장을 오락으로 소비하고 폭력성을 조장한 제3자들이 공범으로 존재했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범죄 피해의 희생양이 되지 않더라도 여성은 평범한 하루하루를 정서적 공허감과 결핍을 채우는 행위로 보내기도 한다. 소비나 덕질(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해 파고드는 일)에 자신을 지나치게 의탁하거나 과몰입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여가 활동을 넘어 덕질 대상과의 동일시 단계에 이르는 것은 분명 과도하다. 그 밑바탕에는 온전한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 자리할 가능성이 크다.

 

너무나 일상화 된 나머지 공기처럼 존재하는 우울감을 많은 여성은 스스로 인지조차 못하고 산다. ‘사회화 된 여성’이란 어느 정도 울분은 당연하다고 내면화한 뒤 ‘참고 살기’의 달인이 되는 과정인지 모른다. 책 미괴오똑을 통해 해부되는 여성 우울증의 면면 역시 ‘우울하다’는 한마디로 뭉뚱그려지기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현미경을 들이대 보니 우울보다는 분노에 가까워 보였다. 이름표를 찾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분노와 불안은 갈 곳 잃고 방황하다 여성의 내부를 향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찌르는 자해와 같은 형태가 여성 우울증의 중요한 특성이다.

 

같은 울분을 느꼈을 때 남성은 이를 발산하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이라면 여성은 이조차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으니 공격성을 자신에게로 분출한다. 우리가 화를 낼 때 그 대상은 보통 나보다 약한 존재, 만만한 상대다. 이 사람한테는 ‘그래도 되니까’ 화를 내는 것이다. 대부분 여성에게 그런 만만한 존재란 같은 여성이거나 좀 더 편리하게는 자기 자신이다. 내가 나를 괴롭히는데 대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남을 못살게 굴면 손가락질을 받겠지만, ‘나를 파괴할 권리’를 행사하는 여성은 지탄받지 않는다.

 

욕 먹지 않는, 드물게 안전한 선택지로서 여성이 나도 모르게 채택하곤 하는 ‘자학(自虐) 개그’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곤 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경미한 여성 우울증일 가능성, 약자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분노할 권력을 잃어버리고 매순간 무해할 것을 강요받는 여성에게 남은 옵션이 그리 많을리 없다. 많은 여성이 화를 내 마땅한 순간에 오히려 웃어 넘기는 이유, 행여나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까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이유를 반드시 짚어봐야 한다.

 

세상은 마지막 보루까지 내몰려 끝내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여성의 취약함을 철저히 이용한다. 후진국형 사회일수록 약자를 보호하는 장치나 분위기가 없어 이들에게 더욱 가혹한 법이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여성은 가장 손쉬운 타깃이다. 이들에게 뻗치는 마수의 손길을 보면 마치 기다렸다는듯 벌떼처럼 달려든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메신저 등으로 ‘도와달라’는 글을 남긴 여성에게는 순식간에 음흉한 속내를 감춘 남성들이 무더기로 접근하지만, 성별을 바꾸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전혀 흔들림 없고 정신적으로 강인한 여성이 늘어나는 것을 이 사회가 정말 원하는지 이제 의문이 들 지경이다. 굳이 이 상황을 개선하려는 적극적 노력이나 조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긴커녕 짐짓 방관하고, 위기에 처한 여성이 연루된 각종 서사를 극적으로 또 선정적으로 소비하기에 바쁘지 않은가.

 

혹은 어떤 사건에든 올가미에 걸려든 여성의 ‘완벽한 피해자성’을 의심하며 당할 만 한 건 아니었는지 끝없이 묻는다. 이런 피해자 탓하기(victim blaming)는 같은 여성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험한 일 당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나) 사이에 선을 그어야만 애써 나는 안전하다고 위안할 수 있어서다. 

 

드라마에서 늘 ‘위기에 빠진 여인’은 남성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다. 남성이 지켜줄 만한 대상, 취약한 상태가 되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인기가 올라가는 사회를 투영하는 것 같아 고개를 젓게 된다. 남성도 여성도 이 공식에 익숙해진 건 아닌지, 그로 인해 확산하는 불건강하고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관계의 위험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저서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삶을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 죽어있는 것을 갈망하며, 점점 더 수동적으로 변해간다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가 여성의 생명력과 활기, 정신적 독립을 키워주지 못하고 그 반대를 조장하는 현실은 그런 점에서 매우 안타깝다.

 

여성들이 자신을 학대하기보다 정확하게 분노하고, 자기 감정에 충실하며 솔직해질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이는 여성 개인의 의지는 물론 사회적 분위기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병행되어야 가능하다. 그 날이 올 때까지, 부디 모두 잘 버텨낼 수 있기를.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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