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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 “근대 개념어의 탄생… 메이지 지식인의 知의 지도” [김용출의 한권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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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3-13 07:30:00 수정 : 2023-03-11 17: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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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學)이란 원어대로 만물을 분명히 알고, 그 근원에 따라 그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술(術)이란 생겨남을 아는 것이라는 원어처럼, 만물이 성립하는 근원을 알고, 그 성립하는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일본의 근대 사상가 니시 아마네(西周)는 영어 단어 ‘science’와 ‘arts’를 각각 학과 술로 번역 소개하면서 정의와 함께 두 용어간 차이도 설명한다. 특히 의학과 의술을 예로 들면서 학과 술의 차이를 드러낸다.

 

니시 아마네의 모습(사진 속 오른쪽)

“의사를 불러 치료를 하는데, 의사가 인체의 근육과 뼈, 피부와 살, 오장육부의 구조를 아는 것이 학이요, 총에 맞은 다리를 치료할 때는 이렇게 근육과 뼈의 구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총탄을 어떻게 빼낼까를 궁리하여 치료를 하는데, 이것이 곧 술이다.”

 

젊을 땐 제법 긴 장발에 가운데 가르마를 하고 눈빛이 강렬했지만, 나이를 먹어선 머리는 벗겨지고 대신 긴 수염이 인상적인 니시는 이어 학과 술이 진리에 관여하는 방식이나 체계도 서로 다르다며 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이언스와 아트는 진리의 탐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이언스에서는 지식을 위해 탐구하지만, 아트에서는 제작을 위해 그렇게 한다. 즉, 사이언스는 더 상위의 진리에 관련된 것이며, 아트는 상대적으로 하위의 진리에 관련된 것이다.”

 

주로 중국과 조선에서 사상과 문물을 흡수, 발전시켜온 일본 지식인과 엘리트들은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는 서구 문물을 도입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서구 사상과 문물에 곧바로 대응하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발상이나 개념, 용어가 없었다. 모두 새로 만들어야 했다. 서양 사상과 문물을 흡수해 일본을 근대화하고 싶었던 이들은 그야말로 발상과 개념, 용어 등 기본부터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됐다. 서구의 사상과 문명이 당시 일본 사회와 생활에 실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상과 개념과 용어를 먼저 가져온다는 건 그들에게 추가적인 연구와 고민, 노력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일본 문명 전환기에서 서구의 사상과 발상, 용어를 도입하고 번역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니시 아마네였다.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 모리 아리노리 등과 함께 ‘문명개화’를 기치로 내걸고 메이료쿠샤(明六社)를 결성해 학술의 개념어를 비롯해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철학, 예술, 이성, 과학, 기술, 논리학, 심리학, 의식, 지식, 개념, 귀납법, 연역법, 정의, 명제, 분해 등 많은 개념어를 고안해 번역하고 전파했다.

 

“니시는 서양 학술을 문자 그대로 몸으로 받아들이고 기존의 한문 교양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러나 그에만 머무르지 않는 지식과 발상에 대해 새로운 일본어를 창조하고, 때로는 이를 다듬고 수정하는 노력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는 말의 기초를 구축했습니다.”

 

니시 아마네의 고민과 사유를 담은 그의 메모들

구체적으로, 니시는 영어 ‘deduction’을 ‘연역(법)’으로 번역하면서, 그 이유를 고양이와 쥐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연역이란 글자의 뜻을 보면, 연은 늘리다, 역은 실마리에서 실을 끌어낸다는 뜻으로 무언가 겹치는 부문이 있어 거기서 뽑아낸 것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미침을 말한다. 이를 고양이가 쥐를 먹을 때에 비유해보자. 고양이가 쥐를 먹을 때는 먼저 가장 중요한 부문인 머리부터 시작하여 차츰 몸통, 네 발, 꼬리에 이르게 된다...모두 중요함을 가리키는 하나의 기호로서 여기서 수많은 도리를 이끌어낸다.”

 

반면, 영어 ‘induction’은 ‘귀납(법)’으로 번역 소개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선 반찬 먹기로 비유하며 설명한다. “induction, 즉 귀납법은 연역법과 반대로서 이를 사람이 반찬을 먹을 때에 비유해보겠다. 사람이 반찬을 먹을 때는 가장 맛있는 부문을 조금씩 먹고, 마지막에는 먹을 수 있는 부문을 전부 먹는다. 이와 같이 진리도 같은 부분에서 시작해 그 전체를 알고자 할 때 밖에서 안으로 모으는 것이다.”

 

문학과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도 도드라진다. 즉, 문학, 언어가 없이는 진정한 학술이 될 수 없다고 문학 또는 언어야말로 학술과 사상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해준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학술에 이르려면 문학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문학의 공덕을 말함이다. 그 공덕의 첫 번째는 지금보다 먼 옛날에 통하고, 두 번째는 사해를 통한다. 무언가에 통달하려면 반드시 문학의 공덕이 필요하다. 또 위에서 말한 두 가지와 반대되는 것도 있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오늘날을 알려주고, 그들이 우리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학의 공덕은 사방으로 통한다. 고로 문학이 필요하다. 또 문학이 없으면 학술이 되지 않는다.”

 

니시 아마네의 고민과 사유를 담은 그의 메모들

니시와 동료들이 만든 많은 개념어들은 현대 일본어의 기초가 됐을 뿐만 아니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한국과 중국에 퍼져 나간 뒤, 현재 한·중·일 세 국가에서 통용되는 주요 개념어로 자리 잡았다.

 

특히, 사상과 개념어가 유통하는 과정에서 국력을 비롯해 역학이 작용했다. 니시는 영어 ‘philosophy’를 ‘철학’이라는 개념어로 번역, 일본에 소개했다. 당시 중국을 비롯해 동아시아에선 철학에 해당하는 말로 이학(理學)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일본이 동아시아 근대를 주도하면서 철학이라는 용어가 동아시아에 정착됐다.

 

근대 동아시아 개념어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니시 아마네는 성리학에서 출발해 서양 학문으로 전향한 대표적인 메이지 계몽 지식인으로 꼽힌다. 1829년 시마네현 쓰와노정에서 태어난 니시는 어릴 때 한자와 의학을 배웠다가 ‘난(네덜란드)학’으로 선회했다. 특히 1862년 일본인으로선 처음으로 네덜란드에 유학해 라이덴대학 법학교수 시몬 피세링(Simon Vissering, 1818-1888)으로부터 법학과 철학, 정치와 경제 등을 배운 뒤 1865년 귀국한 게 결정적이었다. 그는 이후 메이지 신정부 일원으로 일하면서 서양의 사유와 개념을 흡수해 정력적으로 전파했다.

 

일본 및 동아시아 지혜를 바탕으로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창조적으로 받아들이고 전파한 니시의 발상은 1870년 경 사숙에서 행한 강의에서 잘 드러난다. 이 강의를 문하생 나가미 유타카가 필기한 강의록이 바로 ‘백학연환’이었다. 백학연환은 백과사전(Encyclopedia)의 일본 번역어다.

 

니시는 당시 서구의 사상과 학문 전체를 상호 연관 속에서 넓게 바라보고 수용하려 시도했다. 그는 강의에서 그가 어떤 사유적 맥락에서 서구의 개념과 용어를 번역, 전파했는지 이야기한다.

 

“강의 전체를 읽으면 여하튼 그들의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학술의 전체상을 조망해 보여주겠다라는 패기가 전해지는 듯합니다...백학을 조망하겠다는 시도는 위의 비유를 빌리자면, 장기나 체스에서 상대방의 수나 말이 놓인 판을 보는 것, 어떤 단어를 다른 단어와의 관계 속에서 살피고하 하는 데 해당합니다.”

 

근대 동아시아 개념어의 정초에 기여했던 니시의 강의록 ‘백학연환’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해설한 독립 연구자 야마모토 다카미쓰(山本貴光)의 단행본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메멘토)이 번역 출간됐다. 책은 2011년부터 2013년에 걸쳐 산세이도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133회에 걸쳐 연재한 저자의 <백학연환을 읽다>를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책은 니시가 접했을 법한 서양의 각종 저서, 영영사전 등은 물론이고 당시 지식인들이 필수로 배워야 했던 한학까지 종횡무진하면서 일본과 서구의 지식 체계가 서로 얽히며 새로운 말이 탄생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근대 개념어의 탄생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들이 어떻게 지(知)의 세계를 그려가려 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백학연환>에 대한 분석과 해설이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연재를 묶은 것이라서 일부 반복 중복된 부문은 눈에 띨 수도 있겠다. 책의 부록에는 니시 아마네의 강의록 <백학연환> 전문이 실려 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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