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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은 ‘먼저 온 통일’… 우리 사회 중요 역할 기대” [차 한잔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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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3-05 21:46:35 수정 : 2023-03-06 15: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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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권시민연합 김영자 사무국장

국내외 北인권운동 산증인 불려
‘인권’ 생소하던 때부터 27년 활동
통일부 직접 가 탈북민 책 팔기도
中서 구조한 청년 당시 눈빛 선해
사명 다짐… 총 1157명 생명 구조

많아야 열 명쯤 모일 수 있는 조그만 회의실을 보물들이 가득 채우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수여한 포장증, 박관용 국회의장 수여 감사패, 이명박 대통령 수여 훈장증, 최문순 강원도지사 수여 DMZ 평화상패…. 국내는 물론 미국과 캐나다의 각종 문화재단, 인권재단이 수여한 상패와 트로피 10여개가 반짝거리고 있다. 이들의 노고를 치하한 정부는 정권의 정치적 성향을 가리지 않았고, 국적과 상관없이 세계적 인권재단과 지도자들이 이들의 노력에 사의를 표했다. 훈장으로 빽빽한 가운데서도 탈북민 화가인 선무와 강춘혁 작가의 대형 회화, 드로잉 미술작품이 한자리를 차지해 ‘영광의 벽’을 한층 빛냈다.

 

이런 성과를 낸 곳은 1996년 창립 이래 27년째 활동을 이어가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이다. 김영자(69) 사무국장은 성과를 견인해 온 일등공신이다. 그는 글로벌 북한인권운동의 산증인이자 국내 3만 탈북민의 ‘대모’라 불릴 만하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의 시민연합 사무실에서 김 국장을 만났다.

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국장이 지난 2월 28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시민연합 사무실에서 세계일보와 만나 북한인권운동에 투신한 계기와 북한인권문제 등을 설명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시민연합은 국내외 북한인권단체를 대표하는 곳이다. ‘북한인권’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허허벌판에서 단체를 시작했다. 환경은 척박했고, 개인으로선 희생을 각오해야 했다. 20대 초반이던 1970년대 한 인권 강연을 듣다가 감명을 받아 그길로 국제앰네스티 한국사무소에 찾아가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이때 인연을 맺은 고 윤현 전 이사장 등이 1994년쯤 북한 주민 인권을 위한 단체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윤현 선생님, 김상헌 선생님 같은 분들이 저를 설득했는데, 처음엔 사양했죠. 제 형편이 여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인권운동이라니 배곯으며 할 게 뻔하니까요. 그런데 윤현 이사장님은 굉장히 전략적이고 혜안이 남다르신 분이었기 때문에 그걸 믿었죠. 198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도움을 받은 우리가 이제 북한 사람들을 위해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셨죠. 저보다도 그분들 능력이 아까워서 그럼 잠시 돕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온 거예요.”

 

2년여 준비 끝에 1996년 출범한 단체 활동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었지만, 김 국장 특유의 돌파력이 단체의 자산이 됐다. “옳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뒤에는 옆을 보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그는 이런 사례를 소개했다.

 

“탈북민 이순옥 작가가 정치범 수용소 실태를 담은 책 ‘꼬리없는 짐승들의 눈빛’을 냈을 때, 제가 배낭에 책을 잔뜩 넣고 통일부로 가져가 이건 사야 한다고 했죠. 인권운동하는 친구에게 커피 사준다고 연락 오는 친구가 있으면, ‘나 커피 대신 책 사줘’라며 그 책을 팔아줬고요. 그렇게 400권을 팔았어요.”

 

“힘든 기억은 메아리가 없을 때였다”고 한다. “처음엔 정치범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리자, 세계에 북한인권 문제를 알리자는 목표 하나로 여기저기 뛰었어요. ‘우리는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 지정만 되면 해산할 겁니다, 그때까지만 할 겁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운동을 하다 보니 중국, 러시아 등지를 떠도는 탈북민 문제도 심각하고, 국내 정착 문제도 심각하고, 다뤄야 할 문제들이 확장돼갔죠.”

 

특히 생명을 구한 경험은 27년을 현장에서 발벗고 뛰게 한 계기가 됐다. “중국에서 맨 처음 스물 여덟의 청년을 구했을 때를 잊지 못합니다. 부모와 여동생이 굶어 죽고, 혼자 남동생을 데리고 탈북한 청년이 쫓기다 산속에 숨었어요. 밤에 나와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생활하고 있었죠. ‘당신을 구하러 왔다’고 했을 때, 그 눈빛을 잊지 못해요. 마치 사냥꾼에 쫓기던 짐승 같았으니까. 이건 꼭 해야 하는 일이구나, 이 눈빛을 잊어선 안 되겠구나 생각했고, 지금까지 1157명을 구했습니다.”

 

그는 탈북 후 성공적으로 정착해 통일부 공무원이 된 아이, 책상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했는데 결국 명문대에 입학하더니 유학까지 가서 박사가 된 사례, 변호사가 되고 출산까지 해 멋진 아빠가 된 아이 사례를 열거하며 신이 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는 단발인 은발마저 경쾌한 사람이다. 일흔을 앞둔 나이가 믿기지 않는 젊은 에너지를 뿜어낸다. 비결은 이런 보람에서 나오는 듯했다. “탈북민을 ‘먼저 온 통일’이라고 하잖아요. 이들이 언젠가 우리 사회에서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봅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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