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美 암묵 속 우크라이나, 지도서 사라질 수도”

관련이슈 디지털기획

입력 : 2023-03-06 07:00:00 수정 : 2023-03-05 20:42:05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우크라이나전쟁 1년] ④ 전쟁의 향방(하)

우크라 서부 5州 과거 폴란드 땅…폴系 대거 거주
폴 난민 적극 수용·군비 대폭 확대 고토 회복노려
강대국 이해일치 땐 우크라 東西 러·폴 분할 가능성
美에는 ‘폴 카드’로 獨제어, ‘러 카드론’ 中견제 묘수
국제정치선 설마가 현실화된 사례 적지않아 주시를

“서구 언론이 언급을 꺼려 노출되지 않은 시나리오 하나가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지도에서 사라질 가능성에 관한 것입니다. 러시아가 동남부 4개 주를 점령한 후 곧바로 자국 영토로 병합함으로써 이제 우크라이나는 분할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분할이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해체될 가능성까지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러시아 전문가인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장은 우크라이나전쟁 사태와 관련해 이례적으로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가 소멸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러시아와 폴란드가 불구대천 관계일지라도 우크라이나전쟁이 양국의 타협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여기에 수면 아래서 주변 강대국들 이해관계가 수렴되는 거래가 성사된다면  갈리치아(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남부를 이르는 명칭)는 폴란드 영토로, 나머지는 러시아 영토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며 “러·폴 양국이 실리를 추구해 우크라이나 영토를 일정 경계선에서 분점·병합하고 상호불가침 약속을 하면 전쟁은 종식되고 우크라이나는 소멸한다”는 것이다. 홍 원장은 이와 관련해 “한반도는 우리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미·소 밀실 거래로 38도선을 경계로 두 동강 났다”며 강대국 정치로 남북이 분단된 사례를 상기시켰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평화협상에서 춘계 격돌의 의미

 

-홍 원장이 예고한 춘계 대회전(大會戰)을 앞두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교전이 격렬해지고 있다. 춘계 대회전은 양측에 어떤 의미인가.

 

“평화의 조건에 대한 러·우 양측의 간극이 넓어 대화가 공회전만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춘계전투는 협상의 주도권 장악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크라이나가 바흐무트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에 나설 경우 주요 공격 루트로 자포리자에서 아조우해로 진입하는 멜리토폴 방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군이 남진해 돈바스에서 크림으로 이어지는 육로회랑의 허리를 끊고 러시아군을 동서로 분리하면 키이우는 더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에 나설 수 있다. 반대로 군사력 정비를 마친 러시아가 전쟁의 승기를 잡아 돈바스 미점령지를 모두 차지하고 나아가 우크라이나 내륙 심장부로 깊숙이 진격해 드니프로강 동쪽 지역까지 장악할 경우 크렘린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평화협상을 강제할 수 있게 된다.

 

크렘린 전략가들로서는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남부 4개 주를 최소한 자국 영토로 인정받고 전쟁을 끝내려면 그 이상의 대규모 공격 옵션을 포기할 수 없다. 현 전선에서 종전을 성사시키려면, 지난 1940년 소련·핀란드 겨울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핀란드의 만네르헤임 방어선을 돌파하는 정도로 승리를 거둬야 한다. 핀란드는 만네르헤임 방어선이 무너지자 소련과 평화협상에 나서 영토의 11%를 양도하고 종전했다.”

 

◆ 러시아 전쟁 지도부의 플랜C

 

-춘계 대회전의 포인트는 무엇이 될까.

 

“러시아의 춘계 대공세와 관련해 세밀하게 주시해야 할 관찰 포인트 하나가 있다. 우크라이나의 수중에 있는 미콜라이우주와 오데사주로의 진격 여부다. 말하자면 크림에서 몰도바로 연결되는 흑해 좌안(左岸)의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을 확보하는 계획이다. 수포가 된 키이우 속전속결 점령이 플랜A라면. 러시아 본토에서 돈바스를 거쳐 크림에 이르는 흑해 우안(右岸)의 육상통로 확보, 즉 우크라이나 동남부 접수가  플랜B라고 할 수 있다. 크림에서 미콜라이우와 오데사를 거쳐 몰도바에 이르는 또 하나의 내륙통로를 개통하는 것이 플랜C에 해당한다.

 

-러시아군은 어떤 공세를 취할 것으로 보는가.

 

“지난해 5월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남부 4개 주의 고수와 돈바스 미수복지 탈환에 화력을 우선해서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왕 칼집에서 칼을 빼낸 상황에서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칼을 더 휘두를 공산이 크다. 대상은 크렘린의 시선이 항상 머물러 있는 곳, 즉 흑해 좌안 남부 지역의 추가 확보다. 러시아는 전황을 보아가며 특정 시점에 미사일과 전투기, 탱크 등을 동원한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감행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본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오른쪽)과 로베르타 메솔라 유럽의회 의장이 지난 4일 우크라이나 리비우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공보실

 

◆ 흑해 좌안 점령이 중요한 이유

 

-”이런 공격 옵션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우크라이나의 내륙국가화를 통한 힘의 약화다. 몰도바 동부에는 중앙정부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친러 자치공화국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있다. 만약 러시아가 미콜라이우주와 오데사주를 점령하면 크림반도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까지 이어지는 두 번째 남부 육상회랑이 열린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바다를 향한 출구, 즉 흑해를 상실해 내륙국가로 전락하게 된다. 동부에 밀집한 석유화학·제철·항공산업 등 경제의 척추를 잃게 되고 인구도 2300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며 국내총생산(GDP)도 3분의 1로 쪼그라들게 된다. 결국 러시아의 지정학적 급소로서 우크라이나가 갖는 전략적 가치가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우크라이나가 흑해를 상실할 경우 러시아의 포위로 국세(國勢)가 현저하게 약화한다는 의미로 정리된다. 

 

“둘째는 전략적 요충지 흑해 연안 지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 장악이다. 18세기 말 예카테리나 여제(女帝) 이래 흑해는 러시아제국의 성장과 유럽 열강으로의 웅비에 크게 이바지한 중요한 해양 교두보였다. 그러나 (소련 해제로)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가 서구에 포섭되고 점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기지화가 되어감에 따라 흑해는 러시아의 안보에 비수를 들이대는 치명적인 위협 공간으로 변했다. 실제로 2021년 7월 러시아가 내해로 간주하는 흑해에서 2주간 진행된 나토의 다국적(32개국) 해상 연합훈련은 크렘린의 안보적 신경 줄을 크게 자극하면서 영토 방어에 대한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자포리자와 헤르손에 이어 미콜라이우와 오데사를 차지하게 되면 러시아는 옛 소련처럼 흑해 일대를 공고히 장악할 수 있게 되어 해상안보를 확보할 수 있고 동시에 유럽, 특히 지중해를 향한 힘의 투사 능력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 우크라이나 남부벨트 병합의 지정학적 의미

 

-러시아는 흑해 확보로 다시 전략적 우세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셋째는 역사적 고토(古土) 노보로시야(Novorossiya·신러시아)의 완전 회복이다. 노보로시야는 18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이 새로 확보한 영토, 즉 도네츠크·루한스크·자포리자·크림·헤르손·미콜라이우·오데사·몰도바의 트란스니스트리아 공화국을 하나로 묶어 만든 행정구역 명칭이다. 당시 제정러시아는 오스만튀르크로부터 할양받거나 카자크 군사 조직이 확보한 흑해 연안의 우크라이나 남부벨트를 병합해 자국령으로 만들어 이곳을 노보로시야라고 불렀다.

 

미콜라이우와 오데사의 장악은 일차적으로 노보로시야 지역의 완전 수복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 대통령)의 유라시아 지도 다시 그리기, 즉 재소련화 야망과도 맞닿아 있다. 옛 소련 구성국에 속해 있지만 사실상 독립국 지위를 누리고 있는 조지아의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 몰도바의 트란스니스트리아 등 친러 성향의 자치공화국들을 크림 합병 때처럼 기회를 엿보며 러시아연방의 일원으로 하나씩 귀속시켜 나갈 가능성을 열어놓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나 안보적으로, 군사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미콜라이우·오데사 공략은 크렘린이 쉽게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물론 투입 병력과 무기, 보급 등 작전 수행에 필요한 여러 조건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실행 여부를 떠나 크렘린의 군사 옵션에는 분명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흑해 확보는 결국 우크라이나 제압, 전략적 요충지 확보, 역사적 과제 해결이라는 다각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사실상 동맹국인 벨라루스에 러시아군 병력과 장비를 대규모로 배치하고 연합군사훈련을 자주 시행하는 것은 키이우의 재점령과 드니프로강 이동(以東)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군사적 몸풀기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전쟁 지도부의 주의와 전력을 동부·북부로 분산시켜 흑해 연안 남부 지역 방어를 헐겁게 해 기습 점령하려는 위장 전술일 가능성도 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탄약과 무기, 병력이 고갈돼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만약 크렘린의 군사 옵션이 실행된다면 서구가 제공하기로 한 주력 전차인 레오파드 2(레오파르트2)와 M1 에이브럼스 등이 도착하기 전에 이루어질 공산이 크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역시 배수진을 치고 지키려 할 것이기 때문에 흑해 좌안 남부 지역 진격을 위한 플랜C는 자칫 제3차 대전의 뇌관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러시아 육군의 152㎜ 2A36 기아친트-B 곡사포가 불을 뿜으며 포탄을 발사되는 장면이 러시아 국방부 공보실이 지난 4일(현지시간) 제공한 영상에서 포착됐다. 모스크바=EPA연합뉴스

◆ 한반도 모델로 향하는 우크라이나전쟁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향방과 관련한 네 번째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평화협상을 통해 전투를 잠시 중단하는 휴전 또는 정전이다. 평화협상에서 정치적 합의가 교전 당사자 사이에 이루어지면 휴전이 되고, 제3국 또는 국제기구와 같은 중재자가 개입하면 정전이 된다. 이 시나리오는 예상되는 봄철 대회전이 어느 일방의 승리로 끝나지 않고 지금처럼 전선이 고착되어 군사적 균형 상태가 지속될 경우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교전 당사국의 물리적 능력이 고갈되고, 우호 세력의 지원 역량도 소진되며, 국제사회의 피로도 역시 증가할 것이 자명하다. 또 정치적 야망이 강한 푸틴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어떤 출구전략을 모색하더라도 어느 일방은 정치적 지도력에 치명적인 자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전쟁의 승패를 유예하는 무승부, 즉 현상을 미봉해두면서 전투를 일시적으로 멈추는 휴전 또는 정전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협상 중재자로는 러·우 양측 모두에 거부감이 적은 튀르키예 또는 이스라엘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현시점에서 평화협상을 통해 휴전이나 정전이 성립되면 이미 군사적 대치선이 형성된 우크라이나 동남부 4개 주가 분단선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전쟁이 한국전쟁과 자주 비교되는 이유다. 한국전쟁은 정식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채 정전협정을 통해 싸움의 막을 내렸다. 이후 70여년간 전쟁이 실질적으로 종결됐지만, 종전을 선언하지 않아 국제법적으로 전쟁 지속상태에 놓여 있다. 언제든 휴전이 다시 열전으로 재점화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2014년 시작된 돈바스 내전은 휴전과 열전을 반복하면서 8년간 지속하였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종전도 휴전(정전)도 없는 장기전이다. 러·우 간 정전·휴전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남부 4개 주를 실효 지배하면서 군사적 긴장 고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거나 저강도 전쟁이 지속하는 경우다. 러·우 양측에 정전·휴전이 매력적으로 보여도 서로 유리한 협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상당 기간 소모전이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전쟁 당시 협상을 시작하고도 실제 휴전까지는 2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이처럼 휴전 성립까지는 지난한 협상 과정이 기다리고 있는데, 양측은 아직 협상 테이블에도 마주 앉지 않았다. 자칫하면 1979년 소련의 침공 이래 휴전 없이 10년간 지속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재연이 될 수도 있다.”

 

◆ 우크라이나 소멸 가능성 대두

 

-그밖의 다른 시나리오는 없나.

 

“서구 언론이 언급을 꺼려 노출되지 않은 시나리오 하나가 또 있다. 우크라이나가 지도에서 사라질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러시아가 동남부 4개 주를 점령한 후 곧바로 자국 영토로 병합함으로써 이제 우크라이나는 분할의 길목에 들어섰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분할이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해체될 가능성까지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의 가정으로서 러시아가 향후 대공세에서 노보로시야 전역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고 드니프로강 서안 지역으로까지 진격하게 된다면 우크라이나는 강대국 간의 영토 거래로 분할을 넘어 지도에서 지워질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인가.

 

“이런 시나리오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 눈독을 잔뜩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지역에 역사적 연고가 있는 루마니아와 헝가리까지 표정을 숨긴 채 우크라이나 전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 소련은 폴란드로부터 동갈리치아, 루마니아에서 부코비나 북부와 남베사라비아, 헝가리로부터는 자카르파티아를 획득했다. 특히 자카르파티아는 처음으로 소련 시절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전후 러시아가 접수한 이 지역이 지금 우크라이나 서부를 구성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지도. 게티이미지뱅크

 

◆ 우크라이나 서부에 눈독을 들이는 폴란드

 

-우크라이나가 소멸할 수도 있다는 전망엔 구체적 근거가 있나.

 

“우크라이나 서부에 역사의 일부가 걸쳐진 세 나라 가운데 제국 성향의 포식성 동물인 폴란드의 동향이 특히 심상치 않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갈리치아를 역사적 영토로 간주하는 폴란드는 러시아의 노보로시야 장악 계획처럼 고토 회복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서부 5개 주는 과거 폴란드 영토였고 그래서 폴란드계 주민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지원에 적극적으로 보이는 폴란드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소멸할 수 있다니 처음 접하는 전망이다.

 

“지난해 전쟁 발발 이후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 국경을 개방해 인적 왕래를 자유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 회원국 가운데 난민 수용을 가장 강력하게 거부했던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가장 많은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폴란드에는 우크라이나인 약 220만명이 살고 있고 매일 수천 명이 월경(越境)하고 있다. 난민에게 영주권, 일자리, 교육 및 병원 이용 등 다양한 사회적 편의와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면서 갈리치아 지역이 정서적으로 조금씩 폴란드로 편입되는 느낌이다. 강대국 사이에 낀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근대적 의미의 국민국가, 주권국가를 형성해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폴란드 역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를 국가로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노릴 수 있다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입은 믿지 말고 행동을 믿어라’라는 말은 인간사에만 아니라 국제관계에도 적용되는 고전적 경구다. 우크라이나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국제의용군 가운데 폴란드 국적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무엇보다도 폴란드의 비약적인 국방비 증액이 예사롭지 않다. 나토 회원국 평균 국방 예산이 국내총생산(GDP)의 2%를 밑도는 상황에서 폴란드는 2.42%(지난해)를 기록했고 올해는 무려 4%, 2025년에는 5%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정예 병력을 25만명 수준으로 확대하고 민간 방위 인력 5만명 육성 계획도 발표했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폴란드의 경제 규모 대비 국방 예산은 나토 동맹국 중 최대치를 기록한다. 지난해 폴란드는 한국과 K2전차 180대, K9 자주포 212문 등 57억6000만 달러(약 7조848억 원) 상당의 무기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덕분에 한국의 방위산업은 하늘을 찌를 듯 고공성장을 거듭했고 마침내 국제 무기 시장에서 메이저 리그에 진입했다.”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노릴 수도 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러시아와 폴란드는 같은 슬라브 민족이지만 역사적으로 증오로 점철된 견원지간(犬猿之間)이다. 그러나 불구대천 관계일지라도 우크라이나전쟁이 양국의 타협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여기에 수면 아래서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수렴되는 거래가 성사된다면 갈리치아는 폴란드 영토로, 나머지는 러시아 영토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러시아로서는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역은 점령해도 실익이 없다. 역사적 영토가 아니기도 하지만 반러 정서가 워낙 강해 관리·통치 비용이 많이 들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이렇게 러·폴 양국이 실리를 추구해 우크라이나 영토를 일정 경계선에서 분점·병합하고 상호불가침 약속을 하면 전쟁은 종식되고 우크라이나는 소멸한다. 한반도는 우리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미·소의 밀실 거래로 38도선을 경계로 두 동강 났다.”

우크라이나 제10독립산악강습여단 병사가 지난 4일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최전선 지역에서 프랑스제 MO-120-RT61 박격포를 발사한 뒤 몸을 움츠리고 있다. 도네츠크=AFP연합뉴스

◆ 미국에 유용한 폴란드 카드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러·폴 양국이 분할하는 것을 두고 보겠는가.

 

“우크라이나전쟁은 시간과 지구력 싸움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큰데, 워싱턴 전략가들로서는 우크라이나 방어가 어려워지는 상황에 몰리면 차라리 친미 성향이 강한 폴란드의 몸집을 키워 최일선에서 러시아에 맞서는 서방의 방패로 내세우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미국 등 서구의 전비 지원이 밑 빠진 독처럼 늘어나고 민생경제가 피폐해져 국민의 아우성이 커진다는 현실이 이런 전략적 사고에 힘을 실어준다. 서구가 지불할 전후 복구 비용 부담도 줄어든다. 비밀리에 재추진하려는 우크라이나의 핵 보유 욕망도 원천 차단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러·폴 분할이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도 부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영국이 떨어져 나간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 이후 EU에서 제3의 파워로 부상한 폴란드를 잘 관리하면 러시아 견제만 아니라 미국의 리더십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독일의 야망도 일정 수준 제어할 수 있다. 독일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폴란드를 체스판의 말로 사용하는 것은 유럽을 통제하는 데도 매우 유용한 지렛대가 된다. 상황 여부에 따라서는 우크라이나 분할이 모스크바를 베이징의 품 안에서 분리하고 대중국 봉쇄 전선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묘수로 활용될 수도 있다.”

 

-이런 전망하는 미국의 구체적 움직임이 있었나.

 

“전선의 장기 고착으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결정해야 할 시점인 지난 2월(20~22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폴란드에서 열린 동유럽 나토 동맹국 안보 협의체 부쿠레슈티 9개국(B9) 정상회의에 이례적으로 참석했다. 필시 무슨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바이든의 폴란드 행차는 외견상 러시아의 침공 1주년에 즈음해 서방의 단일대오를 과시하고 전쟁 장기화로 안보 불안감이 고조된 동유럽 나토 회원국에 대한 확고한 방어 공약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포적으로 EU의 쌍두마차를 이루는 독일과 프랑스의 지도력을 약화하려는 의도가 다분하고 동시에 폴란드에 힘을 실어주면서 우크라이나 미래에 관한 일종의 컨센서스 형성 또는 외교적 정지 작업 목적의 행보로도 해석할 수 있다. B9 정상회의는 불가리아·루마니아·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로 구성된 EU 내 친미 성향 국가 모임이다. 러시아 견제에서 동일한 전략 관점을 공유한 동유럽 지역 나토 회원국이 주축이다. 2014년 모스크바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 이후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이듬해 결성됐다. 최근 상대적으로 친러 행보를 보인 헝가리는 B9에서 한 발 빼는 모양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이번 폴란드 B9 정상회의에 불참했다. 헝가리는 이미 자카르파티아에 시선이 가 있을지 모른다.”

 

◆ 폴란드가 쥐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운명

 

-한국에서 폴란드는 주변 강대국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로 알려졌는데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소멸의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니 상상 못 했던 일이다.

 

“혹자는 21세기 문명시대에 우크라이나의 소멸이 무슨 뇌피셜(腦+official: 주로 인터넷상에서 객관적인 근거가 없이 자신의 생각만을 근거로 한 추측이나 주장을 이르는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물론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려면 서구 세계의 동의와 같은 크나큰 난관 해소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국제정치에서 설마가 현실이 되는 경우를 심심찮게 목도한다. 푸틴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이 언론에서 ‘전쟁이 끝날 때쯤 우크라이나는 없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한 언술은 빈말이 아닐 것이다.

 

한때 폴란드가 지도에서 종적을 감춘 역사는 우크라이나의 해체 가능성이 결코 지나친 망상이 아님을 증명한다.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1772, 1793, 1795년 세 차례에 걸쳐 분할되어 123년 동안 지도에서 사라졌다. 강대국에 포위된 한국도 37년간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이 있다.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만약 강대국의 영토 흥정으로 한때 소멸한 국가(폴란드)가 인접국(우크라이나)을 지도에서 지운다면 그 국제관계의 냉혹함에 전율을 느낄 것이다.”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장이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강연하고 있다. 홍완석 원장 제공

●홍완석 원장 약력

 

◆홍완석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장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한국외국어대 대학원 동구지역연구과 석사 ▲모스크바 국립국제관계대학교(MGIMO) 정치학박사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장 및 러시아연구소 소장 ▲외교부·국방부 정책자문위원(현)


김청중 기자 c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