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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의사람연구] 어떤 재판에서 일어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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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2-27 23:37:35 수정 : 2023-02-27 23:3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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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학대받다 남편 죽인 아내
정당방위 인정 못 받고 ‘집유형’
가정폭력 방어 울타리 못 되는
현대의 형사사법 체계 바꿔야

해피엔딩이지만 피해자의 유가족에게는 가장 원치 않던 결말이었다. 17년 동안 성적으로 학대를 받던 여성은 배우자를 살해하고도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나 세 자녀에게 돌아갔다. 얼마 전 있던 울산지법의 판결이다.

‘살인범에게 4년 집행유예라니…. 3년 징역형이 무슨 의미가 있나, 지나치게 관대한 처분 아닌가?’ 혹자는 이렇게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아마 배심원 중 일부도 이런 문제를 평의과정 중 지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판결은 배심원 만장일치, 그리고 재판부 3인의 판사들도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고 한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

이번에도 정당방위 주장은 불발되었다. 오랫동안 폭행과 성폭행에 노출되었던 피해여성이 마지막 순간 가해자였던 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사건들에서 해외 재판부는 정당방위를 종종 선고해왔다. 피학대 여성 살인범을 면책한 것이다.

미국에서 이 같은 판례는 1980년대부터 찾아볼 수 있다. ‘매 맞는 아내 증후군’이라는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변론은 피고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본능적인 자기방어의 불가피성을 범행의 동기로 인정하는 것이다. 뉴욕주의 경우, 입법까지 하여 피학대 여성의 학대가해자에 대한 공격에 대한 감형사유를 널리 인정하고 있다. 이 법률의 관련 조항들을 적용해보면 울산지법 사건은 충분히 형사책임을 면제받을 해당요건이 있었다.

하지만 국내법의 경우, 살인사건 범행 당시의 정신상태에 대하여서는 극도의 합리론에 근거하여 보수적으로 판단한다. 즉 피학대 여성들의 방어본능조차 쉽게 인정되지 않는다. ‘고의’의 과대 적용, 마지막 순간에도 배우자를 죽이는 일은 합리적 테두리 내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이번 사건도 피해자인 학대가해자는 잠이 든 중에 살해되었다. 이런 무방비 상태에서는 객관적으로 볼 때 방위의 절박함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폭력을 오래 연구해온 심리학자 르노어 워커 박사는 배우자를 살해하는 피학대 여성은 ‘anger’(앙심) 때문에 학대가해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fear’(공포) 때문에 공격자를 살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방위의 필요성은 합리적인 인간의 심적 상태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십수 년을 도주하지도 못하고 감금당하다시피 하면서 폭행과 성폭행의 피해를 반복적으로 당한 피해 당사자의 주관적 심정 상태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울산지법 국민배심원단 앞에서 필자는 전문증인으로서 이 같은 쟁점을 설명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결국 정당방위는 이번에도 인정되지 않았다. 다만, 부분적인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던 점은 피고인이 아이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보수적이지만 진보적이기도 했던 솔로몬의 의사결정이었다.

이 재판에서 아쉬웠던 점은 사실 정당방위 변론의 기각이 아니다. 그보다는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가정폭력에 대하여 왜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형사정책 시스템은 이를 막지 못하는지에 관한 문제다. 17년 동안 학대기간 동안 피고인은 단 한 번도 112에 신고하지 못하였다. 피고인은 피해자가 보복할 것이 두려웠다. 아이들과 친정식구들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홀로 폭력을 참아내야 하는 고통보다 훨씬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가정폭력사건은 여전히 반의사불벌죄로서 동거인을 대상으로 고소를 유지할 수 있어야만 사건화될 수 있다. 처벌불원의 의지를 피력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수사절차와 사법절차는 중단된다. 피해자와 가해자 분리가 안 된 상태에서 가해자의 회유와 협박은 피해자 신변보호조차 쉽지 않게 만든다.

가정폭력으로 감히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못했던 울산지법 사건 피고인은 남편을 살해한 직후 밑도 끝도 없이 114에 전화를 하였다. 이 터무니없는 통신기록은 범행 당시 피고인 정신상태가 ‘멘붕’이었던 것을 입증함과 동시에 사법기관에 대한 ‘신뢰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인 것으로도 읽힌다. 홀로 고립되어 폭력과 성폭력이라는 쏟아지는 폭풍우 속에서 그나마 아이들을 지키는 데 매달렸던 피해자에게 정당방위의 ‘현재성’ 원칙은 너무나 가혹하다. 필요할 때는 ‘짠’ 하고 나타나 구해주지 않다가 사법판단만을 소위 ‘정의’라고 들이대는 현재의 형사사법체제는 대폭 개선이 필요하다. 피해자의 생명권보호에 장애가 되는 반의사불벌 조항이라면 과감하게 삭제하는 것이 옳다.

인간은 합리적 판단만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도 가끔은 실수를 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감금되거나 학대받으며 자신이 사실상 원하는 선택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처벌불원과 같은 원치 않는 선택을 하고 나서도 남들에게, 나아가 사법기관에 ‘내 뜻’이 맞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은 고의적인 거짓말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수사나 재판의 실무자들은 그 말뜻의 배후에 숨은 의지를 가슴을 열고 헤아려 보아야 한다. 오랜 기간 폭력에 노출되었던 피해자는 특히 취약하다. 터무니없지만, 형사사법기관의 실무자들이 어디선가 배트맨처럼 나타나 피해자를 구조해주는 구원자가 되길 기대해본다. 장애가 되는 법률조항은 개정하는 것이 답이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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