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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죽음까지 미룬 ‘실록정신’

입력 : 2023-02-25 01:00:00 수정 : 2023-02-24 19: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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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무제에게 부조리 고변했다 ‘무망죄’
마흔여덟에 궁형 당해 살이 썩어나가
선친 유언인 ‘사기’ 완성위해 치욕 견뎌
5년 뒤 중국 3000년 역사 52만자에 담아

문장은 곧았고 반드시 시비를 밝히고
헛되이 찬양 않았고 악한 것은 드러내

죽을 때까지 수정과 퇴고 계속 이어가
혼신의 집필로 ‘태산 같은 죽음’ 맞이해

사마천 평전/장다커/장세후 옮김/연암서가/4만원

공도(公道)와 양심, 정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승전을 전할 때는 모두 축하하다가, 패배하자마자 마치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듯 일제히 비판을 목소리를 쏟아냈다. 역사를 기록하는 한나라 태사랑 사마천은 조정 신하들과 사람들의 이 같은 염량세태를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젊은 장수 이릉은 군사 5000여명을 이끌고 나갔다가 흉노족 8만명에게 포위당했다. 그는 후퇴하면서도 흉노 1만명을 베었지만, 지원이 없어 중과부적으로 포위돼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무려 3만명의 기병을 이끌고 출정한 이광리의 군대는 아예 흉노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했다.

사마천 초상화

권신들과 사람들은 영악했다. 무제의 심사를 꿰뚫어 보고 무제가 아끼는 총희의 오빠 이광리의 대패는 거론하지 않은 채, 모든 잘못을 마지막까지 싸웠던 이릉에게 돌렸다. 이릉에게 병력을 지원하지 않은 지휘부의 잘못 역시 쏙 뺐다. 부조리한 세태를 참지 못한 사마천은 무제에게 솔직하게 의견을 밝혔다.

 

“이릉은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고, 사와 사귐에 신의가 있으며, 줄곧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만 5000의 보병만 거느리고 흉노의 온 나라 역량을 끌어내어 적병 1만명을 죽였습니다. 비록 싸움에 패하여 적에게 투항하기는 했지만, 그 공이 과를 필적할 만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릉은 결코 진심으로 적에게 투항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한 왕조에 보답할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입니다.”

지원 부족 문제가 부각될 것을 우려한 이들이 이릉에 대한 허위 보고를 올리자, 한 무제는 이릉의 집을 멸족시키라고 명했다. 자연스럽게 이릉을 공개적으로 두둔한 사마천도 임금을 ‘무망’한 죄에 부쳐졌다. 기원전 98년 겨울, 마흔여덟의 사마천은 성기와 고환을 도려내는 궁형을 당했다. 염량세태를 거스른 그의 실록 정신, 기자 정신이 부른 화였다.

기존의 사마천 평전과 달리 학문적 고증이 풍부한 ‘사마천 평전’이 최근 번역 출간됐다. 저자 장다커는 사마천의 실록 정신으로 ‘문장은 곧고 기록은 핵심적이고, 헛되이 찬양하지 않고 악한 것을 숨기지 않으며, 당대 역사를 비판적으로 다룬다’를 꼽았다. 사진은 사마천의 사당. 출판사 제공

그는 이듬해 2, 3월쯤 출옥했다. 몸에선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소변을 볼 때마다 지렸으며, 사람들의 손가락질 역시 떠나질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음을 생각했고, 그 언저리를 배회했다. 죽음은 오히려 아늑하게 보였고, 삶이야말로 오히려 치욕으로 점철된 고통이었다.

“…창자가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뒤틀리는 것같이 근심만 쌓이고, 집에 있으면 정신이 얼떨떨하여 마치 뭔가를 잃어버린 듯하고, 문을 나서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매번 이러한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자주 번민할 때 비로소 사람들과 선인들의 죽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거운 죽음과 가벼운 죽음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죽음이.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더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 더 가벼운데, 이는 죽음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가벼운 죽음을 택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역시 태사공이었던 아버지 사마담과 함께 쓰기 시작한 ‘사기’를 아직 완성하지 못한 데다가, 아버지가 유언한 ‘이름’을 아직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145년 지금의 중국 섬서성 한성시 고문촌에서 태어난 뒤 어릴 때부터 고문에 능통했던 그는, 24세 때부터 아버지의 ‘태사공서’(곧 ‘사기’)의 집필을 도왔고, 아버지가 병사한 36세부턴 자신이 직접 집필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의 육신과 생명은 ‘사기’에 속한 것이며, 또한 부친과 자기의 이상에 속한 것이어서, 그는 죽으러 갈 수가 없었고, 꿋꿋하게 살아야 했다.”

무거운 죽음을 맞기 위해선, 먼저 고통스럽고 치욕스스러운 삶을 견뎌내야 했다. 그에게 죽음은 ‘사기’를 다 쓴 뒤에야 올 것이었다. 굳센 의지로 한자 한자, 한편 한편 써나갔다. 집 밖에선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고, 계절 역시 바뀌기를 반복했다.

장다커/장세후 옮김/연암서가/4만원

궁형을 당한 지 5년 뒤인 기원전 93년, 사마천은 무려 52만자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책 ‘사기’의 기본 내용을 완성했다. 책은 천자와 군국의 문제를 다룬 본기 12편, 은미한 일을 다룬 표 10편, 부문별 테마사 성격의 서 8편, 제후 열국의 역사를 기록한 세가 30편, 열전 70편의 다섯 형식의 130편으로 이뤄졌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서 “하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서로 부합되는 관계를 탐구하고, 옛날과 오늘날의 변화를 살펴 일가의 문장을 이뤘다”고 적었다.

오제에서 한 무제에 이르는 중국 3000년 역사의 변화를 인물 중심으로 검토하고 고찰한 ‘사기’는 인류 역사 서술의 틀을 바꿨다. 먼저, 문장은 곧았고 기록은 핵심적이었다. 주요 인물과 사건을 왜곡하지 않되, 중요한 것을 누락하려 하지 않으려 했다. 둘째, 헛되이 찬양하지 않고, 악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 즉, 반드시 시비를 밝히고, 선을 택하고 악을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당대 역사를 비판적으로 다뤘다. 천자를 폄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한나라 역사를 분석했다.

‘사기’를 완성했지만, 사마천은 죽을 때까지 수정과 퇴고를 멈추지 않았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던 그는 기원전 86년에야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비원이 담긴 ‘사기’를 다 쓴 그가 맞은 죽음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이었을까.

중국 고전문헌학과 사마천 연구의 권위자인 ‘중국사기연구회’ 고문 장다커가 펴낸 ‘사마천 평전’이 최근 번역 출간됐다. 중국에선 1994년 출간된 책으로, 기존에 나온 여러 사마천 평전과 달리 학문적 고증이 많은 게 특징이다. 반면 고증과 인용이 많아서 산만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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