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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저널] 숙종과 상평통보의 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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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2-17 23:53:19 수정 : 2023-02-17 23: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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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사용 장려… 상업 발전 이끌어
정치·경제·국방 분야 ‘치적’ 많아

조선의 19대 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장희빈이다. 장희빈의 유명세 때문에 숙종은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하는 왕이기도 하다. 숙종은 52년 동안 재위한 영조에 이어 두 번째로 재위 기간이 긴 왕으로, 46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정치, 경제, 국방, 문화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경제 분야에서는 상평통보를 전국에 유통시켜 화폐 경제가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노산군으로 있던 단종을 왕으로 복권하고 이순신의 사당인 현충사를 건립하는 등 성리학 이념의 강화와 실천에도 주력했지만, 숙종은 실물경제에도 깊은 감각을 지닌 왕이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1678년(숙종 4) 1월23일(양력 2월13일) 숙종은 대신과 비변사의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폐의 주조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먼저 “화폐는 천하에 통행(通行)하는 재화(財貨)인데 오직 우리나라에서는 누차 시행하려고 했으나 행해지지 못한 것은 동전이 토산(土産)이 아니라는 점과 중국과는 달리 화폐를 유통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입장이 나왔다.

이에 회의에 참석한 허적, 권대운 등의 대신들은 변화하는 사회상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화폐 시행을 건의하였고, 숙종은 이에 화답하였다. 호조, 상평청, 진휼청, 어영청, 사복시, 훈련도감 등의 기관에 지시를 내려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하였고, 돈 400문(文)을 은(銀) 1냥의 값으로 정한 후 시중(市中)에 유통하게 한 것이다.

문(푼)은 냥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가치로, 상평통보 4냥이 은 1냥의 가치를 지녔다. 은은 상평통보 4배의 가치를 지닌 셈이다. 조선시대의 화폐 단위인 1문은 1푼이라고도 했으며, 10푼이 1전, 10전이 1냥이 되었다. 10냥은 1관으로서 관이 최고 화폐 단위였다.

조선시대 1냥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조선 후기의 법전인 ‘대전회통’의 기록에 의하면 1냥으로 쌀 20㎏ 정도를 구매할 수 있었다. 요즈음의 쌀값을 고려하면 은 1냥의 가치는 5만원 정도로 꽤 고액이다.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이 역관 변승업에게 빌렸다는 1만냥은 현재 가치로 5억원 정도가 되는 것이다.

1푼은 1냥의 100분의 1인 5백원 정도로, 걸인이 동냥할 때 ‘한 푼 줍쇼’는 가능한 설정이지만 ‘한 냥 줍쇼’는 거의 강도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상평통보는 나무처럼 생긴 주전 틀에서 동전을 만들어 떼어내는 방식을 취했는데, ‘엽전(葉錢)’이라는 용어는 동전이 주전 틀에 나뭇잎처럼 달려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상평통보의 유통 초기에는 조그만 동전으로 쌀이나 옷을 과연 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동전을 가져오는 자에게 직접 명목 가치에 해당하는 현물을 바꾸어 주었고, 중앙의 관리를 지방에 파견하여 동전 사용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정부가 직영하는 시범 주점과 음식점을 설치하여 화폐 유통의 편리함을 널리 알렸고, 세금을 화폐로 받기도 했다. 한성부, 의금부 등에서는 죄인의 보석금도 현물 대신에 동전으로 받으면서 화폐 유통을 촉진해 나갔다.

숙종 때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게 된 배경에는 왕의 의지와 함께 상공업 발전이라는 시대 상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은 이전까지 화폐 기능을 하였던 쌀이나 옷감보다는 사용하기 편한 금속 화폐의 필요성을 대두시켰으며, 세금과 소작료를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는 조세의 금납제(金納制)도 큰 몫을 했다.

오늘날 현금보다 신용카드 결제가 편리한 것과도 유사한 모습이다. 17세기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정치, 사회, 이념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었던 조선은 숙종이 등장하며 안정기를 만들어 나갔다. 조선시대판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을 지휘해 나갔고, 성리학 국가의 면모를 보다 확고하게 갖추어 나갔다.

전국에 서원과 사우(祠宇)가 설치되었고, 충신과 열녀에 대한 포상 작업이 적극 추진된 것은 이러한 지표들이다. 성리학 이념을 강화하면서도 숙종은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잘 읽어 나갔다.

그리고 상평통보의 유통과 이에 수반한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냈다. 장희빈의 유명세로 인하여 그 존재감이 약했던 왕, 숙종의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졌으면 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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