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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경의행복줍기] 누구나 그리움 하나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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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1-31 23:09:53 수정 : 2023-01-31 23: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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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전원일기 ‘전화’ 편에서 김 회장네 전화 처음 들여온 날, 한밤중에 김 회장댁(김혜자 분)은 수화기를 들고 말한다. 울 엄니 좀 바꿔달라고, 안 되면 말이라도 전해달라고, 막내딸이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다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통화할 수 없는 현실을 모를 리 없는 막내딸은 사무치는 그리움에 수화기를 들고 켜켜이 가슴에 쌓아둔 그리움을 애절하게 토해낸다.

그리움은 마음의 각질을 벗겨내고 부드럽게 만든다. 마음을 맑은 물에 한번 휘 헹군 것처럼 순하게 정화시킨다. 누구나 그리움 하나씩은 가슴에 담고 있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를 바라보며 갈 길을 걱정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나 체크무늬 셔츠를 벗어서 우산을 만들어 주던 첫사랑, 가장 아끼는 무지개색 필통을 선물로 주고 “잘 있어” 울먹이며 전학 간 초등학교 짝꿍, 퇴근 후 항상 모락모락 김이 나는 만두 봉지를 들고 들어오시던 아버지. 동네 만두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몇 번이던가?

사람만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고향 마을 어귀 느티나무, 막내이모에게 받은 첫 선물인 카메라, 노을 풍경이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만난 작은 카페. 평범한 일상을 설탕가루 뿌린 것처럼 달콤하게 만드는 게 ‘설렘’이라면 ‘그리움’은 귀한 물건이 나만 아는 장소에 살짝 숨어 있는 것처럼 절로 미소가 번지게 하는 든든함과 따뜻함이 있다.

큰 수술을 받고 집에서 요양 중인 친구가 말했다. “나는 스물둘의 내가 너무도 그리워. 그때 초록빛 수첩에는 워즈워스의 시구절과 여행계획, 그리고 별자리 전설이 가득 쓰여 있었어. 지금은 온통 돈과 관련된 숫자만 가득해. 그때는 별거 아닌 일에도 까르르 잘 웃고는 했는데 지금은 화를 잘 내.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고. 모든 게 신나고 새롭게만 보인 너무도 예쁜 나이 스물둘의 내가 목이 타게 그리워.” 친구는 울먹였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늘 달리는 중이고 더 많이 갖기 위해 늘 높이뛰기를 하고 경쟁에 뒤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휴식이 불안하다. 도무지 한순간도 마음 편히 쉴 수가 없다. 그러는 동안 몸은 병들어 가고 마음은 돌덩이처럼 굳어진다. 행복할 시간도 없고 행복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지금이라도 틈틈이 휴식을 취하고 가끔씩 가슴에 담겨 있는 그리움을 꺼내서 들여다본다면 뻑뻑한 삶에 생기가 돌지 모른다.

고향집 느티나무는 유년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나 잘 살고 있나?’ 스스로 점검하게 만든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래. 힘들더라도 잘 해보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있을 거야.’ 멋진 자식이 되어 보고 싶어진다.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동네 전통시장 생선가게에서 달랑 동태 한 마리 사며 단골이란 이유로 덤 달라고 떼쓰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런 날은 장바구니에 노란 프리지어와 안개꽃 한 묶음을 사서 담는다. 비릿한 동태 냄새를 덮는 향긋한 꽃향기. 그리움은 참 좋은 감정이다.


조연경 드라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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