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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 시대, 안 쓰고 버틴다”… 지출 공유하며 짠내 소비 [심층기획-직장인들 ‘無지출’ 챌린지]

입력 : 2022-12-31 11:00:00 수정 : 2022-12-31 14: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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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인상률보다 높은 물가상승률에
직장인 소비트렌드 ‘플렉스→무지출’
고물가·긴축 흐름 장기화속 새문화로

식사 선배와 하거나 외부미팅과 겸해
예전엔 꺼리던 회식도 빠짐없이 참석
카페 줄이고 비치된 커피 애용하기도

커피·빵 등 기호품 업종 자영업자 울상
원자재값 상승에 소비 감소까지 이중고
2023년 경제 불투명… 소비풍토 지속될 듯

직장인 황모(29)씨는 몇달 전부터 ‘무지출 챌린지’를 하고 있다. 하루에 지출하는 돈을 ‘제로’에 가까울 정도로 줄이려고 애쓰고 있다. 자연스레 식사는 회사 선배와 함께 하거나 외부 식사미팅을 겸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쩔 수 없이 자비로 해결할 경우엔 편의점 도시락을 이용한다. 예전엔 꺼리던 부서 회식도 빠짐없이 참석한다. 카페에 가는 일도 줄고, 대신 사무실에 비치된 커피를 애용한다. 황씨는 “그동안 커진 씀씀이를 단번에 줄이기 위해 챌린지를 시작하게 됐다”며 “과거에는 ‘플렉스’(부를 뽐내는 소비)가 유행이었지만 요즘에는 짠내나는 소비가 트렌드”라고 말했다.

식사하는 직장인. 게티이미지뱅크

반면 직장인 김모(40)씨는 최근 들어 식사를 함께 하자는 후배들이 부쩍 늘어 적잖이 신경이 쓰인다. 올 초까지만 해도 김씨가 먼저 밥먹자고 해도 선약이 있다며 거절하던 후배들이 이제는 먼저 그를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식사를 하면 대부분 선배인 김씨가 식사비용을 내는 터라 금전적으로 부담이 만만찮다. 김씨는 “후배들에게 밥을 사줄 수는 있는데 선후배와의 친목도모보다는 무지출 목적이 있는 것 같아 조금 얄밉다”며 “소비를 줄여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식사비용이 두 배로 늘어났다”고 토로했다. 고물가와 긴축 흐름이 장기화하면서 최근 무지출 챌린지가 하나의 직장인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분위기다.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무지출 챌린지’

30일 통계청에 따르면 11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5.0%로 나타났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지난 5월 5%대로 상승한 뒤 7월에는 6.3%로 급등하다가 소폭 꺾인 상황이다. 반면 기업마다 다르지만 기본 연봉인상률이 2.5%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연봉이 줄어든 상황이라 경제인구의 구매력은 약해진 상황이다. 직장인들의 구매력이 약해지면서 직장인의 소비 트렌드는 ‘플렉스’에서 ‘무지출’로 급변했다. 신한카드가 올해 1~9월 소셜데이터 언급량을 분석한 결과 ‘무지출 챌린지’ 키워드는 전년 동기에 비해 864%나 증가했다.

또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트렌드모니터에 따르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54.2%가 ‘무지출 챌린지’에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들은 무지출 챌린지를 긍정하는 이유 1위로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수 있어서’(65.6%)를 꼽았다.

 

응답자의 물가 인상 체감도는 무려 96.9%가 매우 높은 수준으로 인식했다. 특히 장을 보거나(68.1%), 외식(63.1%), 주유(50.7%)에 물가 인상을 체감하는 편이라고 응답하는 등 생필품 영역에서 인플레이션 체감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대별로 부담을 느끼는 생활비 항목은 차이를 보였다. 20대의 경우 점심 등 식사비에 가장 큰 부담(36.4%)을 느낀다고 답했다. 30대(38.4%)와 40대(36.8%)는 외식비용, 40대(44%)는 보험과 의료비에서 가장 큰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집계났다. 지출을 아끼는 방법으로 전기료 부담 등을 줄이기 위해 사무실 출근을 선호한다는 사람은 50%로 나타났다.

직장인들의 ‘무지출 챌린지’ 현상은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경제성장률이 정체된 일본은 낮은 연봉상승률과 수입물가 상승으로 구매력이 꾸준히 악화됐다. 일본의 대표적인 ‘무지출 챌린지’ 현상은 편의점 도시락 문화에서 알 수 있다. 일본에는 편의점 도시락은 한화 기준 개당 2000∼6000원 선으로, 소비를 줄인 직장인들의 수요에 맞물려 고공성장을 했다.

최근 한국 역시 이 같은 고물가와 구매력 약화로 편의점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28일 기준 코스피 시장에서 BGF리테일은 전 거래일 대비 3500원(1.68%) 오른 21만2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이는 지난 3년래 최고가를 기록했다. 올해 전반적인 증시 하락장이 계속된 상황에서 BGF리테일 수익률은 연초대비 37.5%를 기록했다. 조상훈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6월 이후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소비 둔화에 대한 우려가 많지만 편의점은 수요 측면에서 타격이 작다”고 분석했다.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 위치한 식당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뉴시스

◆소비가 줄어들면서 자영업자는 ‘울상’

고물가 현상으로 시작된 무지출 챌린지 트렌드는 자영업자의 수익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가격이 상승하면 수요가 더 크게 감소하는 가격탄력성이 큰 업종의 불황은 커진 상황이다. 대표적으로 커피나 빵 등 기호품 업종이다.

카페를 운영하는 최모(30)씨는 최근 석달 동안 순이익을 거의 내지 못했다. 매장을 찾는 손님은 줄어든 데다가, 밀가루 가격은 폭등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가격까지 올리게 되면 오히려 손실이 날 것 같아 밀가루 가격이 떨어지기까지 버티기로 했다. 최씨는 “밀가루는 대부분 수입산에 의존하는데 가격이 체감상 거의 두 배로 뛰어 매출원가 비용이 크게 늘었다”며 “그렇다고 조금 가격을 올리면 손님은 예상보다 크게 줄어든다”고 말했다.

한국물가정보에 따르면 지난 14일 기준 밀가루(1㎏) 가격은 1880원으로 5년 전(1280원)보다 46.9% 상승했다. 설탕(1㎏)은 1630원에서 1980원으로 21.5% 올랐다. 특히 한국은 곡물수요량 2132만t 중 1703t를 수입하는 세계 7위의 곡물 구입국이다. 이 중 밀 자급률은 0.8%에 불과하다. 국제 곡물가격 변동에 따라 가공식품 등 식품가격 등락도 폭이 커지는 구조다.

 

다행히 국제 곡물가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 3월 이후부터 8개월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이달 초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11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전월(135.9)보다 소폭 하락한 135.7로, 올해 1월(135.6)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제 곡물 선물가격도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추세다.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의 11월 국제 곡물 선물가격지수도 161.9로 전월 대비 0.8% 하락했다. 밀의 선물가격은 t당 300달러로 한 달 전에 비해 6.1%, 옥수수는 t당 263달러로 한 달 전에 비해 2.5% 각각 내려갔다.

다만 국제통화기금(IMF)과 한국은행 등에서 내년 한국 경제성장률을 2.0% 이하로 전망, 자영업자의 불황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사회 향해 던지는 이유 있는 냉소 ‘누칼협’

 

올 한 해 인터넷상 가장 유행한 말은 ‘누칼협’이다. 누칼협은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의 줄임말이다. 재테크 분야에서는 고금리나 저임금으로 고통을 받거나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네가 처한 악조건은 누가 억지로 강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며 냉소하는 뜻으로 쓰인다.

30일 소셜미디어 빅데이터 분석업체 썸트렌드에 따르면 누칼협이라는 키워드는 최근 3개월간 트위터, 온라인 블로그 두 곳에서만 약 1만건 언급될 정도로 유행어로 확산됐다.

 

최근 들어 ‘영혼을 끌어모아(영끌)’ 빚을 내 투자했다가 증시 불황, 부동산 값 하락, 고금리로 패닉에 빠진 상황과 맞물려 언급이 늘었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 일각에서는 투자에 책임이 따른다는 게 자본주의의 기본원칙이지만 자칫 모든 책임을 ‘개인 탓’으로만 돌리고 ‘사회 구조적 원인’은 외면하는 풍조를 확산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누칼협이라는 단어는 올 하반기 정부의 2023년 5급 이하 공무원 임금인상안에 반발해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보수인상률 재조정 등을 촉구하는 집회에서도 나왔다. 5급 이하 공무원 임금인상안은 1.7%로 전년 동월 대비 물가상승률인 5.6%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치다. 9급 공무원 1호봉 기본급은 171만5200원으로 내년도 최저임금(월 201만580원) 미만인 상황이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를 두고 “스스로 공무원을 선택해놓고 왜 불만이냐”며 조롱하는 풍조가 늘어나는 상황이다. 공무원 이모(33)씨는 “공무원의 근무조건 악화를 두고 개선은 없고 조롱만 한다면 결국 공공서비스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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