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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계 재일코리안 가족의 아픈 역사

입력 : 2022-10-29 01:00:00 수정 : 2022-10-28 20: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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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오빠 북송된 양영희 영화감독
영화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 풀어

부모에 대한 기억·북한의 가족들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 회고 형식
한국서 기획해 국내서 처음 공개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양영희/인예니 옮김/마음산책/1만4500원

 

한반도는 38도선으로 분단됐지만, ‘재일코리안’ 사회는 거리 구석구석까지 구불구불 38도선이 얽혀 있던 1964년. 영화감독 양영희는 ‘조선인 부락’이라 불리던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태어났다. ‘재일코리안’의 7할이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던 시절이다. 훗날 자신의 가족을 주제로 세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양 감독 부친 역시 조총련 활동가였다. 양 감독의 세 오빠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북송 사업으로 북한에 간 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왜 이런 집의 딸일까”라고 고민하는 시기를 거쳐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2005), ‘굿바이, 평양’(2009)과 극영화 ‘가족의 나라’(2012) 등에서 재일코리안 가족의 아픈 역사를 그려낸 양 감독이 영화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글로 풀어냈다. 그의 전작인 자전소설 ‘가족의 나라’와 ‘조선대학교 이야기’가 일본에서 먼저 출간된 데 반해, 이번 책은 한국에서 기획해 국내에서 처음 공개하는 산문집이다.

재일코리안 가족의 아픈 역사를 그려낸 영화감독 양영희의 신간은 재일코리안 2세로 열렬한 조총련 활동가 부모 밑에서 자란 양 감독이 이른바 ‘귀국 사업’으로 북에 떠나보낸 세 오빠와 가족 이야기를 캠코더에 담게 된 사연과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은 어머니를 인터뷰하고 있는 양 감독의 신작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한 장면. 마음산책 제공 ⓒPLACE TO BE

세 오빠가 북으로 떠난 건 그의 나이 일곱 살 즈음이던 1971년. 각각 만 열네 살, 열여섯 살, 열여덟 살 나이에 북으로 간 오빠들의 북한 생활 시작은 평양과 원산에 위치한 ‘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였다. 1959년부터 시작된 북송 사업을 통해 약 9만4000여명의 재일코리안이 일본에서 북으로 건너갔는데 이처럼 아이만 바다를 건넌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별한 대우를 받으리라 믿었지만 훗날 오빠로부터 들은 당시 생활은 이랬다. “하루에 계란 하나는 먹었나? 그 당시로 치면 파격적인 대우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아서 공부가 눈에 안 들어왔다. 하루 종일 먹을 거 생각만 했지.”

역시 열렬한 조총련계였던 어머니조차 어느 날 북에서 날아온 초췌한 몰골의 아들 사진을 보고 결국 오열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직접 방문한 북한에서 참혹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북에 있는 자식들 삶을 조금이라도 보살피기 위한 양 감독 어머니의 북한행 소포 보내기는 결심에서 신념으로, 그리고 심지어 욕조까지 소포로 보내는 집념으로 나아갔다.

“오빠들을 돌려줘”라는 말을 곱씹으며 울어야 했던 양 감독 역시 그 고통과 상실감을 원동력 삼아 가족 이야기를 캠코더에 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런 삶을 지속할 셈인지, 오빠들 가족은 언제 자립할 생각인지, 받기만 하는 생활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 지금에 와서야 짐을 싸던 어머니의 미소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 눈에는 일본에서 온 상자와 봉투를 열어보고 기뻐할 가족들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오직 그 생각 하나만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 무너진 가족을 재구축하는 데 캠코더가 중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양영희/인예니 옮김/마음산책/1만4500원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어린시절 이카이노 풍경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리고 북의 가족들, 어머니 이야기와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 회고로 채워진다. 세계를 뒤흔든 2001년 9월11일 테러 사태 이후 미국 입·출국이 어려워진 때 마침, 평양에 다녀오려다가 ‘북한을 다녀온 재일코리안’이란 특이한 신분 때문에 유학생활 중이던 미국에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고민하던 양 감독에게 “당신은 우리 학생이고, 학생의 배울 권리를 지키는 것이 대학의 의무”라며 주일 미국대사관을 동원하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은사가 보낸 메일이 감동적이다. “평양에서 촬영한다는 어려움과 자기 가족을 찍는다는 어려움 사이에서 고민도 많겠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 후회도 하지 말고. 찍을 수 있는 만큼 찍어 둬. 영화로 만들지 말지는 나중에 생각하면 되니까. 영희에게도 가족에게도 틀림없이 귀중한 기록이 될 거야.”

오랜 작업 끝에 ‘디어 평양’을 공개하자 조총련은 북한을 부정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양 감독에게 사과문을 강요한다. 이를 거부하자 북한 입국을 금지한다. 이로써 북의 가족을 아직까지 못 만나고 있는 양 감독은 4년 후 사과문 대신 ‘굿바이, 평양’을 발표했다. 감독은 작가의 말에 “가족이란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아. 아무리 귀찮아도 만날 수 없더라도 언제까지나 가족”이라고 썼다.

일생을 북한 정권에 충성하며 세 아들까지 북으로 보낸 아버지가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은 건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기 일주일 전이었다. 병상에서 아버지는 양 감독에게 “영희가 정한 길, 쭈욱 가면 돼”라는 유언을 남겼다. 결국 분단 때문에 양 감독과 가족이 감내하고 있는 고통은 장면마다 생생히 전달된다. 그가 가족 이야기를 이처럼 끊임없이 퍼 올리는 이유가 공감된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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