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선에 졌던 수낵이 트러스 후임 총리 돼
“당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You have my full support).”

취임 50일 만에 물러나는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차기 총리 자리를 예약한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을 축하하며 ‘전폭적 지지’를 맹세했다. 수낵 총리 내정자가 지난 보수당 총재 경선 당시 트러스 총리의 감세안을 ‘꿈 같은 얘기’라고 맹비난했던 점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 드는 대목이다.
트러스 총리는 24일(현지시간) 보수당 차기 총재 겸 영국 새 총리로 확정된 수낵 내정자를 축하하는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경쟁자였던 페니 모돈트 현 보수당 하원 원내대표는 동료 의원 100명의 추천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이날 탈락했고,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전날 불출마를 선언했다.
존슨 전 총리가 지난 7월 사의를 밝힌 뒤 트러스 총리와 수낵 내정자는 새 총리가 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트러스 총리가 “부유층 등에 대한 세금을 낮춰 경제성장을 이루겠다”고 공약하자 수낵 내정자는 “동화 같은 경제학”(fairytale economics)이라고 깎아내렸다.
의원들 사이에선 수낵 내정자의 인기가 더 좋았으나 평당원 등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투표에서 트러스 총리가 압도적 득표를 올리면서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지난 9월6일 당시만 해도 생존해 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알현하는 것으로 총리로서 공식 집무에 돌입했다.
이후 여왕이 서거하고 찰스 왕세자가 새 국왕 찰스 3세로 즉위하는 등 큰 변화가 있었다. 영국 국민은 물론 국제사회 시선이 온통 영국 왕실에 쏠리면서 트러스 총리는 취임 초기의 ‘허니문’ 효과를 누릴 기회를 잃었다. 여왕의 국장(國葬) 절차가 마무리된 뒤 핵심 공약이었던 감세정책을 밀어붙인 것이 되레 트러스 총리의 발목을 잡았다.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고 영국의 국가부도 위기가 가중되는 등 극심한 역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영국의 핵심 우방국인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마저 트러스 총리의 감세정책을 ‘실수’(mistake)로 규정하며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고 비웃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습에 나선 트러스 총리는 감세안 추진의 책임을 물어 재무장관을 경질했으나 이 또한 “총리가 자신의 잘못을 부하에게 떠넘겼다”는 비난만 초래했다. 내각의 핵심인 내무장관이 전격 사퇴하는 등 각료들의 이탈 움직임이 가속화하자 트러스 총리는 결국 백기를 들고 지난 20일 사퇴를 선언했다.
일각에선 트러스 총리가 수낵 내정자에게 ‘전폭적 지지’를 약속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보장받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란 해석을 내놓는다. 1975년생으로 아직 47세에 불과한 트러스 총리에게 정계은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앞으로도 보수당 의원직을 유지하며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신임 총리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영국의 전직 총리는 매년 11만5000파운드(약 1억8000만원)의 활동비를 국고에서 지급받는데, 야당을 중심으로 정계 일각에선 “고작 50일 재직한 트러스에게 퇴임 후 활동비를 줘선 안 된다”는 목소리까지 터져나온다. 트러스 총리에게 수낵 내정자의 ‘보호’와 ‘배려’가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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