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번호 앞자리 바꾸는 기기
단속 강화에 숨기는 방법 진화
야산·개집… 은폐 장소 기상천외
車·오토바이에 싣고 다니기도
警 “한강 모래밭서 바늘 찾기”
산 중턱, 폐건물, 개집, 달리는 차량과 오토바이.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특별단속에 나선 경찰이 범행에 쓰인 ‘번호변작중계기’(이하 중계기)를 적발한 장소다. 중계기는 전화금융사기에 주로 쓰이는 인터넷전화 앞자리 ‘070’ 번호를 휴대전화 번호의 앞자리인 ‘010’으로 보이게 하는 기기다. 최근에 발신번호가 070으로 뜨면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가 늘자 010으로 보이게 하는 중계기가 전화금융사기의 핵심으로 꼽힌다. 경찰이 적발한 사례 중에는 달리는 차량이나 오토바이에 장비를 싣고 이동하는 속칭 ‘인간 중계기’까지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지난 4∼6월 전화금융사기 집중단속 기간 중계기 9679대를 적발했다고 18일 밝혔다. 지난 8월부터 이달 말까지 이어지는 2차 특별단속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중계기가 적발될 것으로 보인다.
경찰이 중계기 단속에 나선 결과, 전화금융사기는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9월 전화금융사기 피해액은 316억원, 발생건수는 1289건으로 집계됐다. 피해액을 기준으로 보면 2018년 6월(286억원) 이후 4년3개월 만의 최저치다. 올해 1∼9월의 피해액(4404억원)도 전년 동기(6138억원) 대비 30% 가까이 감소했다.
경찰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서면서 중계기를 숨기려는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인간 중계기가 대표적이다. 중계기를 차량에 싣거나 가방에 넣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식으로 움직여 경찰의 단속망을 피하는 것이다. 지난달 경북 경주에서는 중계기를 가방에 넣고 시내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던 A(21)씨가 검거됐다. A씨는 월 300만원을 준다는 제안을 받고 인간 중계기 역할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관계자는 “이동통신사와 협조해 전화나 문자메시지가 유독 많이 발신되는 중계기를 찾아 수상한 사례가 의심되면 경찰이 위치를 추적한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중계기를 찾는 것은 한강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에 가깝다”며 “차량이나 오토바이로 중계기를 이동하는 경우 그 위치를 계속 추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다수의 중계기는 오피스텔이나 원룸, 모텔, 고시원 등지에서 발견됐다. 최근에는 고액의 아르바이트원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주부 등을 유인해 가정집에 중계기를 설치하는 사례도 있다. 중계기의 형태도 USB 포트 형식이거나 태양광 패널, 무선 라우터, 이동형 배터리를 연결하는 등의 방식으로 발견되고 있다.
중계기는 해외에서 발신한 문자메시지를 010에서 발신한 것으로 둔갑시켜 문자금융사기(스미싱)에도 쓰이고 있다. 불특정 다수에게 문자메시지를 무차별 살포한 뒤 답장하는 사람에게 신분증 사진이나 신용카드 사진 등을 요구하고, 원격제어 애플리케이션(앱) 설치를 유도하는 수법이다. 흔히 언급되는 ‘엄마, 나 휴대전화 액정 깨졌어’와 같은 메시지가 대표적인 문자금융사기 사례다.
경찰은 적발한 중계기를 철거하는 동시에 전화금융사기 피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해당 중계기로 연락받은 상대방에게 직접 안내해 피해 발생을 차단하고 있다. 다만 경찰이 단속을 강화해도 개인이 전화금융사기에 대한 경각심을 갖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피해 방지법이라고 강조한다.
경찰청 관계자는 “국민 대부분이 전화금융사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10년 전과 완전히 다르다”며 “사투리를 쓰는 경우는 아예 없고 전화번호 변작, 악성 앱 등 최첨단 통신기술까지 사용하기 때문에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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