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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인문정원] 요람과 관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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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9-30 22:48:50 수정 : 2022-09-30 22: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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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난파는 피할 수 없는 운명
한줌 희망이 있는 한 아직 살 만해

삶이란 요람과 관 사이의 진자 운동이다. 둘 사이에서 무지몽매한 채로 헤매는 게 삶이라면 요람과 관 사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다. 우리는 먹고 자고 사랑하며, 기분 좋을 땐 샤워를 하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약간의 쾌락, 작은 의미, 성취에 따르는 보람 한 줌 따위를 품고 산다. 음악과 춤, 시와 이야기는 고명이나 같다. 그 너머에서 아른거리는 행복은 초콜릿 한 조각처럼 구체적인 실물이 아니다. 이것은 늘 추상이고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다.

 

살아남음은 수수께끼와 비밀들을 안고, 생사고락을 기반으로 하는 모험이다. 살아남음은 눈부신 역동이고 그 자체로 권력이지만 우리는 자주 살아있음의 가치를 잊는다. 살아있음의 이런저런 복잡한 요구에 응하려는 이들은 우울증과 피로가 누적되고 더러는 소진을 겪는다. 아무 보람도 없이 존재가 고갈되어 그 바닥을 드러낼 때 우리는 좌절하며 죽고 싶어진다. 죽으면 편해질 거야!

장석주 시인

살아있음의 눈부신 찰나는 평범한 시간을 기적으로 바꾼다. 여름 한낮의 땡볕이 정수리를 뻥 뚫어버릴 때 우리는 혼비백산한다. 주삿바늘이 혈관을 찌를 때 그 통증은 선연하고 날카롭다. 올해 처음 따 내린 햇사과를 입안 가득 베어 물 때 과육 향기는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하고, 달콤한 수분은 혀의 미각 돌기에 쾌락을 돌려준다. 아, 가을 아침 낙엽 태우는 냄새는 몸 안에 엔도르핀을 솟게 한다. 그래, 우리에게 살아볼 내일이 있잖아!

 

나는 커피 한 잔을 즐기고, 밀크셰이크와 소금빵을 좋아한다. 아침 식탁에서 조간신문을 펼쳐놓고 읽는다. 손톱과 발톱은 자라면서 우리가 권태에 빠지지 않게 일거리를 만들어 준다. 우리는 볕바른 곳에 앉아 손톱깎이로 손톱과 발톱을 자른다. 이 순간들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신호들로 반짝인다.

 

삶에서 난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군데군데 부서지고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들로 물이 들어와 찬다. 우리는 물이 차는 배를 끌고 저 바다를 항해한다. 역경과 시련을 피할 수 없다. 산다는 것은 고통의 날줄과 슬픔의 씨줄로 짜는 피륙이고, 고통과 슬픔이란 두 악기로 합주하는 이중주다. 고통이 항상 존재에 마이너스를 가져오는 나쁜 경험은 아니다. 고통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지혜를 빚는 경험이 되게 하자. 고통의 심연에서 나오는 저 지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슬픔 역시 소모적 경험만은 아니다. 슬픔이 상실에 대한 애도 반응이라면 참을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슬픔에겐 인내를 갖고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한다. 슬픔은 견딜 수 없는 시간을 견딘 시간이 주는 선물이다. 슬픔은 질주하는 마음을 멈추어 주저앉히고 우리를 단련시킨다. 슬픔은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게 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이다. 슬픔을 양식 삼아 우리는 먼 길을 떠날 수 있다.

 

인류는 지구에서 오래된 동물군에 속한다. 나는 지구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남은 인류의 일원이다. 시간의 폭정 속에서도 살아있음의 찬연함이 깃든 순간은 내 안의 근심에서 벗어나 평안이 깊어질 때다. 홀연 숭고함이 강림하는 에피파니(epiphany)의 찰나다. 인류가 번성을 누리는 동안 세계 기후를 교란시키고, 대기권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최악으로 높이고, 열대우림을 베어 내고, 해수면 온도를 극적으로 올려놓았다. 조만간 닥칠 여섯 번째 대멸종을 피할 수 없다는데,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내가 본 것은 영적인 찰나의 현시가 아닌가? 눈 떠보면 햇빛 아래 꿀벌들이 수레국화 꽃송이들 위에서 잉잉거리고, 그 찰나 정수리 위에서 고요의 무아지경이 폭발한다. 강에는 물고기들이 튀고, 텃밭에는 옥수수들이 쑥쑥 자란다. 세계 한편이 전쟁, 폭력으로 시끄러워도 다른 한편에서는 엄마들이 요람에 누운 아기를 재운다. 아가, 아무 걱정 말고 잘 자렴.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먼 곳을 헤매도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 우리에겐 한 줌의 희망이 있다. 그러니 죽지 말고 힘껏 살아보자.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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