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자기 말고 몸 움직여 머리 비워내야

잠은 효과 좋은 치료제다. 잘 자면 기분이 좋아지고 머리도 빨리 돌아간다. 일이든 공부든 푹 자고 나면 더 잘된다. 시련이 닥쳤을 때도 한숨 푹 자고 나면 맞닥뜨릴 기운이 난다. 하지만 잠이 언제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것은 아니다.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사업이 난관에 부딪혀 골머리를 앓는 경영자가 불면증이 악화됐다며 수면제 용량을 늘려달라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잠 안 오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깨어 있으면 골치 아픈 일만 떠오르니까 약이라도 먹고 초저녁부터 자고 싶어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수록 잠으로 도피하려는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힘든 일이 생겨도 혼자 다 떠안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고민을 떨치려면 잠을 자는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지만, 그럴수록 땀나는 운동으로 머리를 비워내는 게 좋다.
한창 일해야 하는 청년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부모가 억지로 병원으로 끌고 왔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취업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다 보니 청년의 마음에 ‘애써 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부정적 믿음이 뿌리를 내렸다. 활기가 사라지고 꼼짝하기도 싫어지더니 점점 잠자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무리 공부해도 성적이 쉬이 오르지 않는 학생이나 열심히 일하고도 제대로 인정 못 받는 직장인도 비슷한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이럴 땐 과다수면이 심리적 회피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잠으로 도망치지 말고 내 인생의 목표를 향해 조금만 더 애써보자”고 자신을 다독여야 한다.
우울증에 걸리면 잠이 오지 않고 피곤한데도 새벽 일찍 눈이 번쩍 떠진다. 보통의 우울증에서는 총 수면시간이 줄어든다. 그런데 반대로 잠이 쏟아지는 우울증도 있다. 전체 우울증의 약 20%를 차지하는 비정형(Atypical) 우울증이 그렇다. 수면과 함께 식욕도 늘어나고, 드물지 않게 폭식증이 동반되기도 한다. 비정형 우울증에 걸리면 잘 먹고 잘 자니까 ‘속 편하고 게으른 사람’처럼 오해받기도 한다. 겉으로만 보면 우울증 환자처럼 안 보이는 것이 비정형 우울증의 특징이다. 다른 사람이 칭찬해주면 웃기도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내면 감정은 오랜 가뭄에 바닥을 드러낸 호수처럼 메말라 있다. 팔다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납 마비(Leaden Paralysis) 증상도 흔히 동반된다. 물먹은 스펀지처럼 온몸이 축 늘어지고 침대와 하나가 된 것처럼 푹 꺼져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상태에 빠지면 의지력을 발휘해 몸을 움직인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피로하다고 계속 누워 있거나 몇 시간씩 낮잠을 자면 의욕은 자라나지 않는다. 나중에는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 있는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요. 가족들이 나를 한심하게 볼 것 같아요”라며 자괴감까지 겹친다. 세상은 바삐 변해 가는데 자신만 도태된 것 같은 소외감에 휩싸이며 우울증은 더 깊어진다.
긴 잠으로 영혼이 치유될 거라 믿는다면, 그건 착각이다. 누워 있기보단 앉아 있기, 커튼을 젖히고 햇볕 쬐기, 잠옷을 벗고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기, 조금만 힘을 더 내서 신발 신고 문밖으로 한 발짝만 내밀어 보기. 이렇게 작은 행동들이 모여 연쇄반응을 일으켜야 우울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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