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여왕 장례식서 조문 외교
유엔서 ‘가치 글로벌 연대’ 등 제안 연설
총회 기간에 한·미, 한·일 정상회담 추진
캐나다 방문선 AI분야 석학과 대담도
배터리용 광물 공급 ‘세일즈 외교’ 펼쳐
美선 전기차법 등 통상현안 긴급 논의
강제동원 소송 문제 진전 없자 日 반발
“日정부, 유엔서 회담 개최 않기로 조율”
日언론 전망에 약식 회담 추진 가능성
대통령실 “상황변화 없어… 최종 조율 중”
윤석열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5박 7일의 순방 일정 중 첫 방문지인 영국에 도착했다. 윤 대통령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장례식 참석을 시작으로 첫 유엔총회 기조연설과 한·미, 한·일, 한·캐나다 정상회담 등 경제안보 강화와 자유민주주의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연대에 초점을 맞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쯤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숙소로 이동한 윤 대통령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주최하는 만찬 리셉션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해 찰스 3세 국왕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고 장례식 참석차 영국에 온 외국 정상들과 자연스럽게 조우하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추모했다.
윤 대통령은 앞서 김건희 여사와 함께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첫 일정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조문을 고려한 듯 윤 대통령은 검은 양복에 회색 넥타이를, 김 여사도 검정 투피스 차림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환송장에는 국민의힘 정진석 비대위원장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조현동 외교부 1차관과 콜린 크룩스 주한 영국대사, 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대사, 태머라 모휘니 주한 캐나다 대사대리 등도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당을 대표해 환송을 나온 정 위원장에게 “바쁘신데 어떻게 나오셨느냐”고 물었고, 정 위원장은 “건강하게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에는 김 여사와 함께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엄수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윤 대통령은 런던에 머무는 동안 영국군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도 찾아 헌화할 계획이다.
윤 대통령의 본격적인 경제안보·가치 동맹 연대 관련 행보는 미국 뉴욕과 캐나다 토론토·오타와에서 이뤄진다.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은 앞서 이번 순방의 3가지 키워드로 자유와 연대, 경제안보, 기여 외교를 꼽은 바 있다. 윤 대통령은 제77자 유엔총회 첫날인 20일 10번째 순서로 유엔총회 기조연설자로 나선다. 대통령실은 유엔총회 연설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맞닥뜨린 위기 상황 진단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가치 글로벌 연대’를 제안하는 내용이 담길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같은 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면담을, 그다음 날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재하는 만찬 리셉션에 참석한다. 한·미, 한·일 양자회담은 20∼21일 중 이뤄질 전망이다.

윤 대통령은 22일 캐나다 토론토로 이동, 토론토대학의 인공지능(AI) 연구소를 방문해 세계적인 AI 분야 석학인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교수와 대담을 나눈다. 이어 23일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서 쥐스탱 트뤼도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며 전기차·배터리에 필수적인 핵심 광물의 안정적인 공급과 한국 기업의 캐나다 투자 등 경제안보에 초점을 둔 논의를 심화한다. 윤 대통령과 트뤼도 총리가 앞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한 차례 만났던 만큼 내년 수교 60주년을 앞두고 양국 간 전략적 파트너십 확대 방안도 주요 의제로 다뤄질 전망이다.
윤 대통령은 또 미국 기업을 상대로 한국 투자를 촉진하는 ‘세일즈 외교’에도 나선다. 특히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미국의 전기차법(정식 명칭 기후변화법)으로 피해를 보는 국내 기업에 대한 후속 조치,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등 통상·환율 분야 현안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뉴욕에서 △디지털 비전 포럼 △재미 한인 과학자 간담회 △한·미 스타트업 서밋 △K-브랜드 엑스포 △북미지역 투자자 라운드 테이블 등 경제 관련 일정을 소화한다. 윤 대통령은 중소기업 상품이 전시되는 K-브랜드 엑스포를 참관해 중소기업 해외시장 진출을 지원하며 북미지역 투자자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새 정부의 외국인 투자 유치 의지와 한국 투자 환경에 대해 직접 설명할 계획이다.

◆韓·日정상회담 성사 막판 ‘진통’
유엔총회를 계기로 열릴 예정인 한·일 정상회담을 두고 한·일 양측의 기류가 엇갈리면서 정상회담 성사를 놓고 진통이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실은 “양자회담에 대한 상황 변화는 없다. 일정은 최종 조율 중”이라고 했지만 일본 측 일각에서는 정식회담이 아닌 풀 어사이드(Pull aside: 약식회담)로는 만남이 가능하다며 온도 차이를 보였다.
일본 정부가 유엔총회 계기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하지 않는 방향으로 조율하고 있다고 산케이신문이 18일 복수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지난 15일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뉴욕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해 일정을 조율 중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신문은 “일본 측은 이른바 징용공(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의 일본식 표현) 소송 문제에 진전이 없는 채 정상회담에 응하는 것에 신중하다”며 김 차장의 정상회담 일정 공식화에 대해 “(일본 외무성은) 신뢰 관계와 관련된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발표는 삼가달라”고 항의했다고 전했다.
마이니치신문도 이날 “한국 정부가 개최한다고 발표한 정상회담은 일본 측이 신중한 자세를 굽히지 않아 실현이 불투명하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한국 정부의 발표에 대해 일본 정부 내에선 사실무근이라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면서 유엔총회 계기로 한·일 정상 간 접촉이 실현되더라도 서서 이야기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두 매체 모두 약식회담 형식으로 만날 가능성까지 닫지는 않았다. 풀 어사이드는 통상 다자회의 계기에 공식 회담장 밖에서 격식을 따지지 않고 하는 약식회담을 뜻한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도 지난 15일 한·일 정상회담과 관련해 통상 1시간가량 필요한 정상회담이 아니라 “빡빡한 일정 때문에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얼굴을 마주 보고 진행하는 회담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5박 7일 순방 성과를 위해 윤 대통령 취임 첫 한·일 정상회담 성사를 강하게 밀어붙이다가 일본 측의 반발에 부딪혔다는 해석도 나온다. 대법원이 일본 전범 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 여부에 대한 판결을 미루면서 시간을 벌었지만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부의 민관협의회는 뚜렷한 합의점을 내지 못하고 있다. 상황 변화 없이는 한·일 정상회담은 어렵다는 것이 일본 측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상황 변화에 대해서는 보고받은 바 없다”며 “정상회담 일정은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다만 유엔총회 기간 한·일 외교장관회담은 열릴 가능성이 높다. 외교부는 제77차 유엔총회 기간 중 미국 뉴욕에서 한·미·일 및 한·일 외교장관회담 개최를 조율 중이다. 특히 박진 외교부 장관과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외무상의 양자회담이 성사된다면 지난 7월 일본 도쿄, 8월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관련 외교장관회의가 열린 캄보디아 프놈펜에 이어 세 번째 양자회담이다. 유엔총회 계기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두 장관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 등 양국 현안에 대한 의제 및 협의 수준을 사전 조율하는 성격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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