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지 편집프로그램 포토샵에도 능한 소설가 김중혁은 어느 날 포토샵의 ‘레이어(layer)’ 기능과 그 발상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레이어는 이미지를 여러 겹으로 쌓으면서 편집하는 툴. 레이어라는 발상이 현실 세계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레이어 아이디어를 하버드대 이론물리학자 리사 랜들(Lisa Randall)의 ‘다차원 공간’ 개념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음, 그렇다면... 비록 우리가 현실 세계 속에 살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레이어 같은 또다른 세계나 우주가 있는 건 아닐까.
레이어 아이디어를 오래 전부터 확장시켜 보고 싶었던 개념 ‘딜리터(deleter)’와도 연결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2014년 발표한 장편소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에서 마치 인터넷에서 정보를 지우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서 사람이나 물건을 없애주는 딜리터를 처음 등장시켰던 그는 이후부터 딜리터 개념을 확장시켜보고 싶었다.
다차원 공간 및 레이어 아이디어와, 다른 레이어로 사람이나 사물을 보내주는 딜리터 아이디어를 결합하자 한 편의 소설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리하여 1년 전부터 먼저 소설로 선보인 후 영상 콘텐츠로 확장하는 CJ ENM과 블러썸크리에이티브의 프로젝트 두 번째 작품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만 판타지나 장르 소설 문법을 잘 몰라서 관련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써나갔다. 자연히 이야기는 처음 CJ 측에 보냈던 시놉시스와 많이 달라질 수밖에.
“레이어와 딜리터 이야기를 판타지처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장르 소설을 읽고 공부하면서 소설을 썼습니다. 다만 처음에는 판타지 공간이 소설 속에서 이렇게 확장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못했지요.”
소설가 김중혁이 세계는 여러 겹의 레이어로 이뤄져 있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이 세계에서 한 번쯤 사라지고 싶었던 사람들을 위한 판타지 장편소설 『딜리터』(자이언트북스)를 들고 돌아왔다.
소설의 주인공 강치우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이지만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이들의 의뢰를 받아서 이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돕는 딜리터다. 그는 딜리팅의 대가로 의뢰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제가 어릴 때부터 마이너스의 손으로 유명했어요. 뭘 만지면 전부 사라지고, 깨지고, 망가지고… 그거야말로 타고난 거죠. 모든 걸 망가뜨리는 사람.”(66쪽)
소설가 및 딜리터로 승승장구하던 강치우는 어느 날 자신이 딜리팅한 존재들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리하여 실종자 모임의 배수연 대표와 이윤기, 오재도 형사 등의 추적을 받는 속에서 다른 겹의 세계(레이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조이수와 함께 여정을 시작하는데.
소설가 김중혁은 왜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판타지 소설을 써야 했을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김 작가를 추석을 앞둔 지난 6일 전화로 만났다. 중저음의 그의 목소리는 느릿했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밀고 가는 어떤 힘 같은 게 느껴졌다. 지난 4월 인터뷰 내용도 일부 반영했다.
―이번 장편 출간을 앞두고 특별한 이벤트도 했는데.
“지난 8월 한 달간 독자 200분을 대상으로 작가 이름을 숨기고 가제본으로 리뷰를 받는 이벤트를 했다. 모처럼 독자들의 리뷰를 열심히 읽은 것 같다. 재미도 있었고, 소설에 어떤 재미를 기대하는 지도 알게 됐다.”
―소설가이자 딜리터인 주인공 강치우는 어떻게 태어났는지.
“저는 그 동안 소설가를 잘 쓰지 않았다. 그런데 딜리터가 하는 일을 생각했을 때 뭔가를 지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동시키는 사람일 수도 있고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 같더라. 딜리터의 일 혹은 이 과정을 의논할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까 소설가인 것 같았다. 소설 후반부의 딜리팅 과정은 소설쓰는 과정과 되게 비슷하고, 소설 전체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을 쓰는 은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딜리팅 과정이 소설을 쓰는 일이고, 소설가가 그 일에 적격일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게 됐다.”
―강치우가 책점을 치는 소설 도입부는 인상적이더라.
“강치우의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책점이다. 아울러 책점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도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텍스트로 환원시키고 텍스트로 번역해 정보를 입수하는 버릇이 있다. 아마 자신의 운명도 텍스트로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만약 오늘이 10일이라면 아무 책이나 펼쳐서 10번째 줄 문장이 나의 운명이라는 식으로 농담처럼 보는 재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책이 많으니까 책을 펼쳐보는 놀이 같은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넣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잠깐, 소설 도입부에서 주인공 강치우가 아침 ‘책점’을 보는 장면을 한번 들여다보자. “강치우는 아침이면 늘 하던 대로 책 한 권을 집어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11월 2일이니까 펼쳐진 페이지의 두 번째 줄 문장이 오늘의 운세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책에 의존하다 못해 하루의 운세마저 책에서 무작위로 뽑아내기 시작했다. 운세가 좋든 나쁘든 하나의 문장을 읽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왼쪽 페이지의 두 번째 줄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래야지. 이미 땅에 묻은 걸.’ 망할, 기분 나쁜 문장이었다. 오늘 겪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불편한 문장이었다. 다행인 것은 종이책에는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가 함께 있다는 사실. 오른쪽 페이지 두 번째 줄로 눈을 옮겼다. ‘위스키 어디에 뒀냐니까?’ 이쪽이 훨씬 나았다. 뭔가 땅에 묻히는 것보다는 위스키를 찾아 헤매는 날이 되기를 바랐다.”(10쪽)
―주인공이 소설가여서 김 작가로 오해할 여지도 있을 텐데.
“출판사와 얘기를 하거나 책 관련 행사를 한다는 점 등은 비슷하다. 하지만 작가가 건물을 가지고 있는 소설 속 설정은 비현실적이다. 예전에 어떤 드라마에서 럭셔리한 소설가가 나왔는데, 비현실적이면서도 재미있는 부분도 있더라. 좀 비현실적이지만 소설가를 한 번 등장시켜보고 싶었다.(강치우는 이기동을 고용하기도 하는데) 국내 현실과는 조금 다르다. 다만 외국 작가나 국내 드라마 작가의 경우 자료를 수집해주는 보조 작가를 두고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 자료 조사원도 있다고 하더라.”
―다른 레이어(세계)를 볼 수 있는 초능력자 조이수는 어떻게 태어난 것인지.
“파일은 읽기나 쓰기 하나만 가능하거나, 쓰기와 읽기 모두 가능한 경우도 있다. 레이어 역시 레이어를 보는 것만 가능한 사람이 있고, 레이어를 보지 못하지만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말하자면 레이어라는 세계를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없기에 파트너를 만들어 서로 보완하도록 했다. 강치우는 레이어를 보지 못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고, 조이수는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사람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두 가지가 결합하는 것이다. 역할 분배 차원 혹은 파트너로 두 존재가 결합돼야 해서 조이수가 필요했다.”
―독자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작품 속 장면이 있다면.
“작품 후반부 강치우가 레이어로 들어가는 장면을 위해서 그 앞에 연극 대본 스타일의 장면을 준비했다. 얽혀 있던 등장인물들이 연극처럼 모두 한 무대에 등장했다가 퇴장하기를 반복하면서 관계가 서로 얽히는 장면을 쓸 때가 재미있었다. 연극 대본 스타일로 썼던 딜리팅 장면부터 그 이후까지가 소설의 하이라이트이자 제일 공을 많이 들인 부분이다.”
―소설이 속도감 있게 읽히던데, 어떻게 한 것인지.
“첫 구상부터 4부, 한 부당 7개 챕터로 쓰기로 했다.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빨리 사건을 감지할 수 있게 이야기 구성을 짰다. 챕터 사이의 시간 간격을 어느 정도로 벌릴 것인가가 중요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벌어지지도 않고 적당한 간격이 유지되도록 했다.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이야기를 따라잡기 힘들 만큼 빠르지 않으면서도 장면이 확확 전환되도록 했다.”
―대사 역시 전작처럼 찰지고 유머러스하다.
“인물들이 대화를 주고받을 때 각자의 방식으로 대화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대사를 계속 곱씹곤 한다. 대사가 여러 개 있어도 누가 한 말인지 정확하게 구분되게 해 가독성이 생긴 것 같고, 빨리 읽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강치우는 굉장히 건방지고, 양자인 대표는 약간 능글능글한 말투이며, 이기동은 더듬는 것 같지만 자기 말을 똑바로 할 줄 아는 사람으로 했고, 조이수는 거짓말을 하지만 곧바로 수정하는 사람으로 구별되도록 했다.”
―순문학 작가가 이른바 장르 소설을 쓴 셈인데.
“장르문학과 순문학이 구분되지 않게 된 건 비교적 오래된 것 같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떤 장르에 더 잘 어울리는지를 생각한 뒤 판타지나 SF, 호러 등 장르적 기법을 많이 가져 오고 있다. 장르 구분 같은 게 이젠 무의미해지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판타지 소설을 쓰면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마음껏 상상해 보고 현실과 다른 새로운 공간을 묘사하는 기쁨 같은 게 있더라.”
―이번 장편은 김중혁 작품 세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장르적 특성 때문에 큰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이전에도 좀비나 SF 장르소설을 쓰기도 했고, 새 장르를 쓴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소설은 소설가, 글 쓰는 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전과 조금 달랐다. 이를 통해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됐던 것 같다. 앞으로 글을 쓴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주인공 강치우가 소설가여서 작품 속에는 소설 창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이나 용어, 방법 등이 적지 않게 나왔다. 예를 들면 현실의 개연성과 소설의 개연성 문제(50쪽), 소설가 헤밍웨이 이야기(96쪽), 글쓰기와 마약의 비교(98-99쪽), 소설과 관찰(177쪽) 등등.
“소설가는 관찰하는 사람이에요. 관찰의 핵심이 뭔지 알아요?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내가 드러나면 관찰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어요. 나를 버리고 상대를 온전히 지켜볼 수 있을 때 관찰이 완성되거든요. 그래서 소설가는 경력이 거듭될수록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사람으로 변하는 겁니다.”(177쪽)
세상과 우리네 삶이 소설보다 더 소설적일 때가 가끔 있다. 학생 김중혁이 처음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글을 쓰게 된 것 역시 그러했다. 그러니까, 고교 시절 시를 좋아했던 그는 이성복 시인이 계명대에서 강의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명대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시인은 계명대 국문학과가 아닌 불문학과 교수였다. 더구나 시를 배우려던 자신의 기대나 예상과 달리, 국문학과는 문학보다는 국어를 주로 가르쳤다. 학과와 맞지 않구나, 하고 생각한 그는 마침내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게 됐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김천이 서울이나 대구 같은 문화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탓에 오히려 더욱 문화적 갈망을 키워왔다. 그래서 자주 대구에 가서 책과 음반을 사서 홀로 읽거나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특별히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글쓰기를 해서 상을 받은 적도 거의 없었지만.
1971년 김천에서 슈퍼마켓을 하는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김중혁은 2000년 문학잡지 『문학과사회』에 중편소설 「펭귄뉴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소설가 김연수와 시인 문태준과 친구다.

―어떤 계기로 작가의 꿈을 꾸게 됐는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야구장에서 플라이볼을 보고서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드라마틱한 계기가 없다.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글을 쓰고 있더라. 굳이 계기를 찾는다면, 영남대 교수였던 이동순 시인이 수강 중에 쓴 글에 대해 문장이 좋다, 작가를 꿈꿔 봐도 좋다고 써줘서 작가를 꿈꿀 수도 있구나, 라고 처음 생각했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 『좀비들』(2010), 『미스터 모노레일』(2011),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2014), 『나는 농담이다』(2016), 『내일은 초인간』 (2019) 등을, 소설집으로 『펭귄뉴스』(2006), 『악기들의 도서관』(2008), 『1F/B1』(2012), 『가짜 팔로 하는 포옹』(2015), 『스마일』(2022) 등을 펴냈다.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심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소설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단편의 경우 초기엔 패티쉬나 편집증적 인간을 많이 다뤘고, 두 번째 소설집 『1층/지하 1층』에선 도시 이야기를 담았다가, 이제 점점 인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작품집 『스마일』은 근원적인 공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혼자 남겨졌을 때 외로움 등의 감정들에 더 집중을 했다. 인간에게 더 가까이 오는 과정 같다.”
―소설쓰기 전략이나 노하우를 공개한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보통 초심자나 글이 잘 안 써진다고 얘기하는 분들은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려고 하기에 잘 안 써지는 것 같다. 앉아서 쓰려고 할 때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이다. 책상에 앉기 전에 이미 다 써놔야 한다. 글을 쓰지 않을 때 쓰고 있는 글이 진짜 글이고 더 중요하다. 정리가 되고 꽉 차 오르면 책상에 앉자마자 쓸 수 있게 된다. 저는 하루 24시간 일하는 느낌이다. 가만히 있을 때도 어떤 상황이고, 어떤 감정이며, 문장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하고 늘 생각한다.”
―단편과 장편 글쓰기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장편소설의 전략이나 방법이 있다면.
“장편소설은 인간이 겪는 사건의 이야기이고, 단편소설은 사건을 겪은 인간의 이야기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단편소설은 인간에 대해 더 집중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 같고, 장편소설은 인간도 드러나지만 사건이 더 중심이 되고, 그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는지가 중요한 것 같다. 단편이나 장편 모두 어떻게 쓸 것인지를 오랫동안 고민하는 과정은 비슷한데, 차이가 있다면 실제 글을 써야 하는 시간이 다르다. 단편은 1년을 고민했다고 하더라도 글을 쓰는 시간 자체는 한 달이면 되지만, 장편은 일단 양이 많으니까 오래 써야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 체력 관리가 중요하고, 꾸준한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장편을 쓸 때 5일 동안 잘 써지다가 하루나 이틀을 쉬어버리면 다시 돌아오는데 힘이 많이 든다. 지속력을 유지하는 게 힘들다. 개인에게 여러 상황과 변수가 생기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집필에만 집중해야 된다는 게 매우 힘든 일이다.”
―장편 쓰기의 즐거움은 꼽는다면.
“장편소설 쓰기에는 짧은 단편에서 느낄 수 없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아주 긴 시간 마라톤처럼 달려서 하이라이트 부문을 쓸 때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적으로 환희랄까 격정, 쾌감 같은 게 생길 때가 있다. 초반에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많은 선택을 해야 하지만, 작품의 5분의 4 지점쯤 오면 작가가 선택할 건 별로 없고 기본 조건을 가지고 마무리를 짓기 때문에 머리로 쓰이기보다 온몸으로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가 되게 재미있는 순간이다. 몸의 힘듦을 감정의 쾌감으로 보상을 받는 것 같다. 그것 때문에 계속 쓰게 된다.(장편소설은 교정과 편집 역할도 매우 중요할 것 같다) 장편소설은 편집과 편집자가 매우 중요하다. 작가 한 사람이 작품 속의 많은 이야기를 여러 각도에서 객관적으로 다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편집자가 다른 각도로, 여러 각도로 보고 이야기해주면 큰 도움이 된다.”
발칙한 상상력과 유머러스한 티키타카 문장이 인상적인 소설가 김중혁은 지난 4월 인터뷰 이후 자신의 생활에 큰 변화가 없다고 했지만, 기자는 두 번째 인터뷰를 한 뒤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그가 현실 세계와 다른 레이어에서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한 사람이 가지는 스펙트럼은 다양합니다.” 이때 지난 4월 인터뷰 내용도 설핏 눈으로 들어왔다. “바깥 활동은 독방에서 혼자 글 쓰는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외롭게 혼자 글 쓰다가 활동을 하거나 강의를 하며 사람을 만나면 행복함 같은 게 있죠. 저의 경우 두 개가 병행돼야 글도 잘 써지고, 일도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맞아, 그가 말하는 스펙트럼이라는 게 다른 레이어의 교묘한 흔적이라면.... 혹시, 그렇다면....
“현실이 하나의 레이어라면, 한 권의 소설 역시 하나의 레이어 같다.” 더구나 그는 「작가의 말」에서 삶뿐만 아니라 소설조차 다른 레이어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내가 읽은 소설이 무수히 많은 레이어로 쌓였고, 내가 만든 이야기를 그 사이에 슬쩍 끼워 넣었다. 시간이 한참 흐르면 현실 레이어와 소설 레이어를 구분하기 힘들 것이다.”(293쪽) 오 마이 갓! 삶도 다른 레이어인데, 소설마저 다른 레이어라면.... 음, 그렇다면.... 다른 레이어의 소설가 김중혁과 그의 소설 이야기를 전하는 이 기사도 다른 레이어에서 온 것일지도. 그러니,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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