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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귀은의멜랑콜리아] ‘우영우 신드롬’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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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8-01 23:27:25 수정 : 2022-08-01 23: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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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인은 천재' 캐릭터 이슈화
현실 속 자폐인 더 소외감 느껴
왜곡된 이미지·동정의 시선 떠나
장애인정책 담론의 장 넘어가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자폐스펙트럼이 있는 우영우 캐릭터가 이슈화하는 것도 다행스런 일이다. 동시에 그 때문에 자폐인이 천재적이라는 편견이 생기는 것, 현실에 살아가고 있는 자폐인이 배제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무관심보다 자폐인에게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신비화는 곧바로 소외로 이어진다. 신비화한 대상은 현실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신비스러움에 포함되지 않는 현실의 개인이 더 많다. 드라마가 만든 이미지 때문에 현실의 자폐성 장애인은 더 고통받을 수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다른 매체로 전이되어 원소스멀티유즈(OSMU) 공법으로 재생산되는 것을 보면 더 위태롭다. 서둘러 재생산되는 아류와 속류는 진정성의 훼손이다. 우영우 이야기를 소비하기는 쉽다. 그 소비가 자폐인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드라마는 딜레마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자폐인에 대중이 관심을 갖게 하는 것도 목표지만, 그 때문에 자폐인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씌우는 것도 피할 수 없다. 드라마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팔리기 위해 대중의 욕망에 맞는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도 불가피하다. 대중이 불편하지 않게 소화시킬 수 있도록 캐릭터를 미화하는 것도 부득이하다. 리얼리즘의 강박 때문에 이런 미화와 왜곡을 비난하는 것은 아예 이들의 이야기를 밖으로 낼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드라마에 대한 메타 담론이 더 많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실제 자폐스펙트럼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육성으로 듣고 그들 가족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 드라마에서 우영우의 말은 또렷하고 분명하다. 그것은 배우 박은빈의 연기였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전달력을 고려하면 배우는 자폐인스럽게 연기하되 분명한 발음(diction)을 취할 수밖에 없다. 실제 자폐인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우영우의 발화 스타일이 자폐인의 발화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를 보았기 때문에 형성된 자폐인 이미지 때문에 자폐인을 이해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안다고 생각하면 영영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도덕성 과시(virtue signaling)의 담론장도 경계해야 한다. 우영우 신드롬이 번지면서 ‘나는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을 이해한다’는 식의 인정투쟁이 잇따르는 것을 보게 된다. 자폐인이 신화화되고 소비되는 것이 불편해 드라마를 보지 못한다고 커밍아웃한 사람을 비난하는 투의 그랜드스탠딩(grand standing)도 발견된다. 이는 도덕적 자기 과시, 도덕적 허세다. 그랜드스탠더는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드러내며 타인과 구별짓기 하고 그것으로 타인을 비난한다. 도덕인지, 도덕적 허세인지는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가 얼마나 독자성이 있는가에서도 짐작된다. 도덕의 눈은 고통받는 타자에게서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관찰해낸다. 누구나 근거로 삼는 선이나 정의에 호소하지 않는다. 도덕은 동어 반복을 하지 않는다.

스물다섯에 돌아가신 나의 외삼촌은 장애인이었다. 그는 영민하고 예민했다. 아홉살이었던 나에게 그는 까칠하고 친절한 삼촌이었다. 나는 그가 세상으로부터 이해받기를 바랐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이해와 무관하게 이 사회의 독립된 개인으로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우영우 신드롬이 강렬해질수록 그 서사가 더 낭만적으로 흘러간 것이 안타깝다. 대중이 더 관심을 가질수록 드라마의 클리셰에서 벗어나 예상을 뛰어넘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낯선 서사로 나아가도 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미학적인 관점에서도 더 훌륭한 드라마가 아닐까. 우영우 신드롬이 도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정책의 담론으로 넘어가길 바란다. 정책이란 정부가 국민에게 재화와 서비스를 분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부가 사회의 구성원인 장애인에 대해 어떤 정책을 연구하고 입안하는지 회의적이다. 알량한 보조금으로 정책을 대신할 수는 없다.

지금 정치권이 정책이 아니라 윤리적 도미노에 빠져 있는 것도 징후적이다. 여당 대표의 성상납 비위 의혹로부터 시작되어 연쇄적으로 부조리 코미디 같은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시작이 윤리위원회 판단이었다는 것도 아이로니컬하다. 진정한 윤리적 주체는 자신이 비윤리적, 반윤리적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자기 의심이 없다면 윤리가 될 수 없다. 확신에 차서 타자를 징계하는 것은 윤리가 아니다. 윤리적 주체는 오히려 주저하고 머뭇거린다. 정치권 안에서 어느 누가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유예할 능력이 있는가. 그들에게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능력이 없다. 판단의 근거로 ‘소명을 믿기 어렵다’를 든 것은 그야말로 반윤리적이며 폭력적이다.

윤리적 성토는 국민이 한다. 이 윤리적 담론에는 징계도, 처벌도 없지만, 그러하기에 윤리적 질문을 더 윤리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만들어진다. 윤리는 힘이 없고, 힘이 없어서 더 윤리적으로 강할 수 있다. 국민을 윤리적으로 사랑하는 정권이 아니라 국민을 정치적으로 두려워하는 정권이길 바란다. 지제크가 말하듯,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가 아니라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야 동정의 도덕이 아니라 현실의 정책이 만들어진다.

스물다섯의 까칠한 삼촌과 이 드라마를 함께 본다면, 그는 어떤 표정일까 생각한다. 나는 그때의 삼촌보다 훨씬 더 나이를 많이 먹어 버렸고, 그 어린 삼촌이 겪었을 세상의 노골적인 동정의 시선이 이제야 가늠이 된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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