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5세까지 ‘누리과정’ 강조한
현행 미취학 아동교육에 배치
3년 뒤 갑작스러운 시행 혼란
직장·이사·돌봄 등 연쇄 영향
“영유아 사교육 시장 더 커지고
교육격차 현재보다 심해질 것”
“가족 전체의 인생 계획이 흔들리고 있어요.”
2019년 2월생 아이를 키우는 A씨는 29일 발표된 정부의 학제개편 방안을 듣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직장 문제로 최근 지방으로 이사 온 A씨는 2025년 말 파견근무가 끝나면 다시 서울 친정집 근처로 이사할 계획이었다. 2026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학제 개편 방안에 따르면 A씨의 아이는 2025년에 입학해야 한다. A씨는 “학교에 가면 손이 더 많이 간다는데 여기서 입학하면 육아를 도와줄 사람도 없고, 중간에 전학을 가야 해 고민”이라고 토로했다. 아이는 내년에 근처 공립 유치원에 입소할 계획이었으나 이 계획에도 제동이 걸렸다. A씨는 “공립 유치원은 한글도 안 가르쳐주는데 언니, 오빠들과 학교에 간다니 걱정돼 사립 기관을 알아보고 있다. 몇 달 뒤 유치원 신청 기간인데 머리 아프다”며 “이런 사안을 갑자기 결정하는 정부 태도에 화가 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부가 취학 연령 하향을 예고한 뒤 반대 여론이 거세다.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이사 등을 계획했던 부모들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정부가 오랜 기간 유지해온 미취학 아동 교육 과정과도 정면 배치되는 정책이란 지적이 나온다.

◆‘놀이 중심’ 강조하더니… ‘빨리 교육해야 효과 커’
31일 교육부에 따르면 정부는 미취학 아동의 공평한 교육 기회를 보장한다며 2012년 만 3∼5세(한국 나이 5∼7세) 공통 교육 내용인 ‘누리과정’을 도입했다. 2019년 개정 누리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이전보다 ‘놀이 중심 교육’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한글 교육도 놀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말·글 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권장하지만, 모음·자음을 따라 쓰는 등 학습 위주 교육은 금지한다.
하지만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9일 취학 연령 하향 계획을 발표하며 “영유아·초등학교 시기 교육에 투자했을 때 효과가 (성인기에 비해) 16배 더 나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만 5세까지 ‘놀이’가 중요하다고 주장해온 정부가 돌연 ‘빨리 교육해야 효과가 크다’고 입장을 바꾼 셈이다.
◆‘3년 뒤 도입 갑작스럽다’ 불만 거세
부모들은 정부 계획이 갑작스럽다며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정부는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취학 연령을 내린다는 방침인데, 이대로라면 2019년 1∼3월생이 만 5세에 입학하는 ‘첫 세대’가 된다. 아이가 2019년 3월생인 B씨는 “한 살 많은 아이들과 지금 어린이집에서 반이 다른데, 2년 반 뒤 갑자기 동급생이 된다는 것 아니냐”라며 “장기 계획을 세워서 어린이집 입소부터 한 반을 만드는 등 순차적으로 추진해야지 갑자기 학교에 같이 가라니 어이가 없다”고 꼬집었다. 2019년 2월생 아이가 있는 C씨도 “첫해엔 한 반 20명 중 4∼5명만 만 5세일 텐데 언니·오빠들 사이에서 알아서 살아남으란 건가”라며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면서 3년 뒤 정책을 이렇게 발표할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는 “공교육 편입 시기를 당겨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오히려 교육 격차가 더 커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모(39)씨는 “대부분 입학 전 한글 공부를 하는데, 학교에 빨리 가면 한글 공부 (시기)도 빨라질 것”이라며 “집에서 잘 못 봐주는 아이들은 뒤처질 것 같다”고 말했다. 5·9세 자녀가 있는 최모(42)씨도 “학교는 유치원보다 하교 시간이 빠르고 방학도 길어 맞벌이 가정 아이는 학교에 다니는 순간 ‘학원 돌리기’가 시작된다”며 “공교육에서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으면서 일찍 편입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라고 반문했다.
취학 연령 하향은 국제적인 추세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9년 기준 38개 회원국 중 만 5세 이하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국가는 4곳(호주·뉴질랜드·아일랜드·영국)뿐이었고, 한국 등 26개국(68.4%)은 만 6세, 핀란드와 스웨덴 등 8개국은 만 7세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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