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임차보증금채권)를 타인에게 넘긴 세입자가 이를 모르는 건물주에게서 보증금을 받아 써버려도 횡령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채권양도인이 채무자에게 양도 사실을 알리지 않고 채권을 돌려 받아 이를 처분할 경우 횡령죄로 처벌하던 판례를 변경한 것이다. 양도인이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어도 이를 형사처벌하기보다는 손해배상 등 민사적으로 해결하는 게 적절하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3일 횡령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A씨는 2013년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100만원인 1년짜리 임대차계약을 맺고 식당을 운영했다. A씨는 계약 만료 전인 2013년 말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해 B씨에게 식당을 양도하며 보증금반환채권도 함께 넘겼다. 그러나 건물주에게는 양도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건물주가 돌려준 보증금 1146만원을 받아 사용했다.
A씨는 횡령죄로 기소돼 1·2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1999년 ‘채권양도인이 양도 사실을 채무자에게 알리지 않고 채권을 돌려받아 수령한 금전을 임의로 처분하면 채권양수인에 대한 횡령죄가 성립한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이 유지됐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23년만에 이 판례를 뒤집었다. 대법원은 “금전의 소유권은 채권양수인이 아니라 채권양도인에게 귀속하고, 채권양도인이 채권양수인을 위해 이를 보관하는 자의 지위에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횡령죄가 되려면 재물이 ‘타인의 것’이면서 횡령 행위를 저지른 이가 그 재물의 ‘보관자’여야 하는데, A씨가 돌려받은 보증금은 A씨 소유로 봐야 하므로 죄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조재연·민유숙·이동원·노태악 대법관은 “종래 판례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이들은 “판례를 변경할 경우 횡령죄에 관한 선례들과 비교해 형사처벌의 공백과 불균형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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