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응 땐 인생 실패·소외감 느껴
다양한 기회 갖고 자신 발견하게
고교 교육도 ‘탈진로’ 지향해야
열여덟 고등학생이 스물셋 교생선생님에게 묻는다. 선생님, 인생이 뭐예요? 어떻게 살아야 해요? 스물셋은 그 질문을 안고 어쩔 줄 모른다. 그 질문을 한 열여덟도, 그 질문을 받은 스물셋도 절박하다. 스물셋은 교육실습을 마치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왔지만, 내내 그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릴없이 교수에게 그 질문을 전달한다.
교수는 그 열여덟, 스물셋의 질문이 고맙다. 그들이 그런 질문을 품고 살아서 고맙고, 그 질문을 자신에게 이어 줘서 고맙다. 이런 릴레이 속에서 인생이 무엇인지가 가늠된다. 인생은 이 질문을 놓치지 않는 과정이다. ‘인생이 무엇일까’ 질문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 자체가 인생이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의 연대가 인생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그 질문을 그치지 않아야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생은 이것이다, 단 하나의 정답으로 사는 사람은 독단과 독선에 빠진다. 인생에 대해 어떤 답이 내려지더라도 그것은 열려 있어야 하며 언제든 바뀔 수 있어야 한다. 타자의 답을 경청하기 위해서다. 타자의 답이 옳아서가 아니라, 타자의 답과 함께여야 내 인생을 살게 된다.
열여덟의 간절한 질문은 꿈을 강요하는 학교와 사회 때문이다. 학교에서 ‘꿈’은 ‘진로’이고 ‘진로’는 ‘고교학점제’와 연동된다. 고교학점제에 적응하지 못하면 마치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한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진다. 확실한 진로가 있고, 진로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는 다른 학생들로부터도 소외감을 느낀다.
현행 고교학점제는 진로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하는 제도다. 고등학생의 꿈을 지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꿈이 없는 학생에겐 어떻게 작동할까.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학생에게는 어떻게 작용할까. 꿈을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꿈에 대한 진입장벽을 만든다. 진로를 찾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만든다. 학생을 더 위축시키고 자기효능감을 떨어뜨린다.
꿈이 없어도 자신을 실험하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고교학점제가 돼야 한다. 어떤 과목을 잘해서가 아니라, 높은 성취를 올릴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는 기회,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학생에게 줘야 한다. 진로에 따라 과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로와 무관하게, 진로가 없어도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고교학점제가 시행돼야 한다.
고교학점제는 다양한 문화에 노출된 중산층 이상 자녀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상징자본과 문화자본을 가진 부모로부터 자녀는 자본 형성을 위한 레퍼런스를 물려받는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밈’(meme)이다. 상징적·문화적 자산은 밈으로 유전된다. 교육의 목표가 계급 재생산이 아니라면, 계급의 해체에 가치를 둔다면, 고교학점제는 ‘탈진로’를 지향해야 한다.
고교학점제에서 많은 학생이 느끼는 상실감은 인정투쟁과도 무관하지 않다. 학교에서 인정투쟁은 ‘성적’으로 환산된다.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은 인정투쟁에서 승리한 셈이고, 나머지 학생은 그 투쟁에서 승리한 학생을 인정해 주는 타자의 역할만 하게 된다. 악셀 호네트가 말한 ‘물화’(物化)가 대부분의 십대에게 일어난다. 고교학점제가 탈진로를 지향하지 않는 한, 수많은 십대의 물화, 꿈의 박탈은 연속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질문 안에는 박탈감이 있다. 꿈을 정하지 못했다고 존재를 의심당하는 박탈감, 스스로도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박탈감. 어떻게 십대가 꿈도 없느냐는 질책은 폭력적이다. 고등학생은 누가 어떻게 때린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맞을 수밖에 없다. 누가 때렸는지 모르기에, 왜 모욕감을 느끼는지 모르기에 더 혼란스럽다.
낙관하고 싶지는 않다. 기성세대의 낙관은 방관에 다름 아니다. 근대 이후 학교는 계급 재생산에 복무해 왔다. 학교에서 인정투쟁은 계급 차이와 무관하지 않다. 고교학점제는 사회의 구별짓기를 더 강화하는 기제가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사회의 변화를 탈권력에서 찾듯, 법치주의의 가치를 ‘법의 무지’(슬라보이 지제크 등이 저술한 책 제목이기도 함)를 인정하는 것에서 모색하듯, 교육은 ‘탈진로’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얼마 전, 졸업한 A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주도라고 했다. 여행이 아니라 일 년간 제주에 머물 거라고 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단다. 그는 느슨한 연대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의 갭이어(gap year: 학업이나 일을 중단하고 자신을 찾는 시간)를 응원한다. 연대와 공부야말로 인생일 것이다. 이 인생 속에 반드시 꿈이 있어야 할까.
열여덟의 질문을 품고 온 나의 스물셋 학생은 이렇게도 말했었다. “살면서 꼭 꿈이 있어야 하는 건가요? 꿈이 없어도 되는 거 아닌가요?” 교육실습을 가기 전, 이 스물셋은 교육실습이 정말 교사가 되고 싶은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단다. 자신과 맞지 않단 걸 알게 되면 확실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레기도 했단다. 그 기대가 무너졌고, 그 무너짐이 좋았단다. 사범대에 들어왔기에 당연히 교사가 되는 경쟁 시스템에 자신을 올린 것이 아니라, 교육실습에서 열여덟을 만나 교사가 되고 싶은 꿈을 갖게 된 것이다. 꿈은 경쟁에서가 아니라, 연대에서 생긴다. 이 스물셋은 열여덟을 만났기에 꿈이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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