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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적인 꾸물거림, 강박·우울증 아닌지 살펴야
스스로 게으르다 탓 하기 전 ‘번아웃’ 점검을

“해야만 할 일이 있는데 자꾸 미뤄두고 시작을 못 하겠어요!” 이런 하소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우울증이 생긴 건 아닌가 확인해봐야 한다. 결정을 못 내리고 우유부단해지는 건 우울증의 대표 증상이다. 전두엽 기능이 저하되어 실행 능력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병적인 꾸물거림(morbid procrastination)은 강박장애의 하나다. 재앙적인 일이 생길 것 같은 공포가 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행동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불안의 아주 작은 불씨가 될 만한 것은 다 찾아내서 완전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에 휘둘려 사소한 문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느라 진짜 중요한 일은 시작조차 못 한다.

그렇다고 미뤄두기를 무조건 정신질환의 증상인 양 덜컥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다. 더 흔한 원인은 번아웃, 즉 소진증후군이다.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느라 의욕이 바닥나면 평소에는 힘들이지 않고 하던 일도 어렵게 느껴져서 시작할 엄두를 못 낸다. 이럴 땐 충분히 쉬어주면 문제는 자연히 해소된다. 자꾸 미루고 제때 일을 끝내지 못한 자신을 게으르다고 탓하기 전에 ‘마음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은 아닌가’ 점검해보는 게 먼저다.

삼십대 초반의 여성이 “학위논문 제출 마감 시한이 다가오는데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어요”라고 떨면서 말했다. 게으름을 피우면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성실하게 공부해왔다. 부지런히 연구하고 자료를 모았는데 논문의 첫 문장도 못 쓰고 있다며 불안해했다. “그러면 글 쓸 시간에 책상에 앉아서 무엇을 하세요?”라고 물었더니 “인터넷에서 다른 연구자가 쓴 논문들만 계속 찾아보고 있어요”라고 했다.

논문을 쓰려고 하니 ‘혹시 내가 놓친 자료가 있는 게 아닐까? 꼭 읽어봐야 할 논문이 더 있을 것 같아’라는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쓰려는 주제에 대해 완전하게 꿰뚫고 있어야 해’라는 열망에 이끌려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졌다. 지나친 완벽주의가 시작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더 근원적인 이유도 있었다.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실험해서 자료를 모았지만 과연 이것이 이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오히려 연구에 활용되고 폐기되었던 실험 동물과 재료를 생각하면 “내가 생명을 빼앗고 자원을 낭비해서 세상을 더럽히고 있는 것 같아 괴로워요”라고 했다. 연구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깊게 사유해서 자기만의 통찰에 이르지 못한 채 권위자가 시키는 대로만 쫓아왔던 것이 꾸물거리는 행동의 더 깊은 뿌리였다.

그렇다면 미뤄두기가 항상 나쁘기 만한 것일까? 꼭 그런 건 아니다.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 잭슨 폴록의 작품 ‘벽화’는 꾸물거림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이 자기 집에 장식될 벽화를 화가에게 의뢰했지만 그는 작업을 시작도 하지 않은 채 시간만 그냥 흘려보냈다. 반년이 지났지만 벽에는 물감 하나 묻어 있지 않자 구겐하임은 그림을 당장 그려놓지 않으면 계약을 폐기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잭슨 폴록은 밤을 꼬박 새워 그림을 그렸고 이튿날 아침 장장 가로 6m에 이르는 ‘벽화’를 완성했다. 믿기지 않는 스토리이지만, 어찌되었든 폴록은 미루고 미루다가 하룻밤의 벼락치기로 추상표현주의라는 새로운 사조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명작을 잉태해냈다.


김병수 정신건강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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