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정구호 연출·미장센
왕실 제사 때 쓰이던 춤 재해석
흐트러짐 없는 55명 군무 백미

춤판이 2000명 넘는 관객을 모으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전속 예술단 중심 제작극장’을 표방한 세종문화회관이 힘주어 만든 ‘일무(佾舞)’가 이를 거뜬해 해냈다. 지난 19∼22일 3000석 규모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 무대 중 한 곳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4차례 공연한 ‘일무’ 평균 객석점유율이 75%를 넘은 것이다. 더구나 창작 초연인 작품이어서 더욱 값진 성과다.
‘여러 사람이 줄을 지어 추는 춤’을 뜻하는 일무는 조선시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서 거행되는 제례의식에 사용된 무용이다. 기악과 노래, 춤이 합쳐진 종묘제례악(무형문화재 제1호)의 일부다. 전통 무용인 데다 왕실 제사 의식에 쓰이던 춤이라 원래는 일반에게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를 동시대 감각을 반영한 새로운 해석과 현대적 색채를 가미해서 새로 만들었다. 지루하기는커녕 관객 심장을 쿵쾅거리게 할 만큼 역동적이면서 아름다운 춤이 관객을 매혹시켰다. 우리 시대 가장 성공한 패션디자이너 중 한 명이자 영화 미술, 무용 연출 등에서 장르를 넘나들며 일가를 이룬 정구호가 연출과 미장센을 맡고, 서울시무용단장 정혜진과 유명 현대무용가 김성훈·김재덕이 안무와 음악을 맡아 무대에 올렸다.
총 3막으로 꾸며진 ‘일무’는 문관의 춤 문무와 무관의 춤 무무가 1막을, 궁중무용 춘앵무가 2막을 장식한다. 3막은 새롭게 창작한 ‘신일무’로 무용수 55명이 시시각각 변하는 오와 열을 맞춰 흐트러짐 없이 추는 ‘칼 군무’가 백미다. K팝 그룹의 전매특허인 ‘칼 군무’를 내려다볼 만큼 압도적이다.
그 결과 ‘일무’는 공연 내내 “전통춤 저력과 현대 무용 미학이 만나 지금 시대를 대변하는 멋진 공연”이란 호평을 받으며 관객을 끌어모았다. 이미 국립무용단과 함께한 ‘향연’과 ‘묵향’으로 한국무용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정구호 연출은 “‘일무’ 1막과 2막은 전통과 전통의 변화, 3막은 새로운 전통으로 전통의 정신을 이어서 이 시대에 어떻게 발전시키고 계승하느냐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무용단이 올 처음 선보인 ‘일무’를 통해 예술단 중심 제작극장의 성공 가능성과 영향력을 확인한 세종문화회관은 산하 예술단과 함께 자체 콘텐츠 제작에 자원과 역량을 집중해 예술단 대표 레퍼토리를 육성하기로 했다. 서울시무용단은 초연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수정·보완해 내년에 더욱 완성도가 높은 ‘일무’를 같은 장소에서 공연할 계획이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