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페미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가부장제에 종속된 여성은 자신의 조국에서 제대로 된 지위도 권한도 갖지 못하며, 따라서 애국심도 요구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 뒤 100여년이 지났지만, 굳건한 가부장제를 나라의 기틀로 삼고 있는 여러 나라들에서 이는 여전히 유효한 말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여성들도 최근 수년 사이 빠른 속도로 이 불편한 진실에 눈 떴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성에게는 좌도 우도 없다”고. 수천년 동안 이어진 남성 중심 사회 하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남성 권력’의 실체이지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성주의’가 있을뿐 왼쪽 오른쪽은 없다”고 선언하는 첫 번째 여성 세대의 등장이다.
좌파도 우파도 뿌리 깊은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저 색깔이 다른 혐오일뿐이다. 어느 쪽도 여성의 성취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보수는 여성을 대놓고 지운다면 진보는 교묘하게 지운다. 전자의 여혐이 기대치 없는 ‘순도 100%’라면 후자의 여혐은 기대한 만큼 더 큰 실망을 안기는 ‘위선과 배신’의 쓴맛을 가득 남긴다. 누가 더 나쁜지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가능한가. 이들 각각의 여성혐오가 경쟁하는 모습은 한국의 페미니즘 백래시 시대를 더욱 뜨겁게 달궜을 뿐이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야심찬 공약으로 내놓고, 상징적 고위직 여성마저 ‘0명’으로 만들어버리는 시대 vs 앞에선 위하는 척하더니 실상은 여성을 착취하고, 내부 성폭력 공론화조차 힘들게 하는 시대. 이렇게 가혹한 밸런스 게임이 또 있을까. 여성을 ‘시민 취급도 하지 않는’ 사회와 어디까지나 ‘2등 시민’으로서만 인정해주는 사회 가운데 양자택일 해야 하는 운명 앞에서 여성 유권자들은 절망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드리워진 장막을 걷어내고 냉혹한 현실을 비로소 마주하게 됐다. 오직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함께.
◆반복되는 성비위…어김없이 여성은 뒷전에
그동안 여성 인권 문제는 여러 진보 의제 중 하나로 다뤄짐으로써 진보 진영 아래에서나 명맥을 이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실질적 진보를 이뤄내기 시작할 때쯤 밝혀진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안희정, 박원순, 오거돈 3연타에 이어 이번에 추가된 3선 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성비위까지. 박 의원의 경우 특히 사건 시점이 지난해 말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그동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체질 개선을 못했다는 뜻이라서다. 자당의 권력형 성폭력 때문에 실시된 지난해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페미니즘 때문에 졌다”는 해석을 했을 정도이니 반복되는 성비위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진보 정당 인사들의 권력형 성폭력 범죄가 줄줄이 터져나오면서 함께 드러난 것은 감춰졌던 남성권력의 본색이다.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헌신하는 것 같던 이들의 행보는 앞뒤가 다른 모순과 내로남불의 결정체였다. 정작 자신에게 힘이 주어졌을 때 이를 폭력적으로 남용하는 위선으로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믿었던 이들의 성폭력만으로도 충격이지만,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더 큰 조직적 문제가 포착됐다. 반성이나 성찰보다 피해자 2차 가해 및 입막음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무엇보다 ‘내 편인’ 가해자에 대한 미온적 태도는 상식적 시민의 지지와 신뢰를 떨어뜨린 가장 큰 요인이 됐다.
결정적으로 이념과 여성이 충돌할 때 여성은 보호받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조직이 우선인 상황에서만 여성을 챙기는 시늉을 했음이 밝혀졌다. 민주당 여성 의원들은 오히려 ‘피해호소인’ 등의 용어 사용에 맨앞에서 동원되고, 피해자 안전을 위협할 기밀 사항을 유출하기까지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이번에도 박완주 의원이 즉각 제명되기만 했을뿐 직접 사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꼬리자르기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국민 사과에 나선 건 박 의원이 아닌 박지현 공동선대위원장이었다.
박 위원장이 말한 ‘수술’이 이뤄지지 않는 한 민주당의 신뢰 회복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까지 사례로 볼 때 우선순위는 늘 여성이 아닌 이념이고 조직의 안녕이었으며, 이것이 흔들릴 위험에 처하면 범죄를 명명백백히 밝히는 정의나 약자를 지키는 일 따위는 팽개쳐져왔다. 이는 여성에게 너무나 큰 폭력이자 두려움을 안기는 일이다. 아직은 여성이 남성의 승인을 받아 생존하는 구조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모든 사태는 명색이 진보 정당인 곳에서조차 여성이 실제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여성이 대변되지 못하고 후순위로 밀리는 것은 결국 여기서도 다르지 않다는 본질을 읽을 수 있다.
◆여성을 다시 ‘집안의 천사’로 가두려는 퇴행
그렇다고 보수가 진보보다 낫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말 그랬다면 20대 대통령선거에서 역대 최소 표차를 이끈 초유의 ‘여성 표 결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보수의 여성혐오 역시 역사가 유구하고 질기다. 다만 진보에 비해 훨씬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여성을 남성과 같은 위치에서 경쟁하는 ‘선수’로 절대 보지 않고, 전통적인 여성의 성역할에 충실한 것이 미덕이라 여기는 그 시선. 다들 익히 알고 이미 잔뜩 질려버린 내용이라 쉽게 뉴스 거리가 되지도 않는 그런 종류다.
성인지 감수성 자체는 사실 더 낮다. ‘미투 운동’ 여파로 진보 인사의 성범죄가 연달아 크게 터져서 묻혔지만 원래 성추문은 보수 진영에서 주로 나오던 이슈다. 이를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현재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성상납 의혹에 휩싸여있고, 모 장관 후보자는 방석집에서의 논문 심사 논란 등으로 불명예 낙마했다.
진보와 다른 보수의 여혐은 좀 더 원초적으로 여성을 찍어누르는 형태다. 주체적 개인으로서의 여성을 지우고 출산·양육·돌봄 담당자로서의 여성만 호명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하기에 폭력성이 높아지면 ‘공포정치’로도 발현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내건 ‘여가부 폐지’ 공약에 여성들이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 것은 그래서다.
여가부를 없애고 인구가족부를 만들어 출생률 위주 정책을 펴겠다는 것이나 여성 정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모두 ‘기혼·유자녀’ 여성만 해당되는 것을 보며 이 공포는 한층 더 현실화됐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은 재생산의 도구이자 사회적 여성성을 수행하는 존재로서 기능할 때에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 ‘희생하지 않는 이기적인’ 여성을 손가락질하는 과거 사회로의 회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라니, 순순히 받아들일 여성이 얼마나 될까. 성평등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다면 성폭력이 범죄화되기도 힘들었던, 여성을 수치심에 입다물게 하던,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할 체계가 없던 그 끔찍한 시대가 다시 올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쯤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다시 소환해 본다. 울프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을 ‘집안의 천사’ 취급하는 행태에 분노하며 자신은 천사 노릇을 거부하겠다고 말한다. 보수의 여혐이 팽배한 사회는 여성들을 그저 집안의 천사로 가두려 한다. 실제로 윤석열 정부는 초대 내각에서 여성 장관 후보를 16.7% 지목하는데 그쳤고, 차관에서는 여성이 0명인 기록을 세웠다. 안 그래도 부족한 자리를 놓고 남자들과 경쟁할 생각 말라는 신호를 주는듯 하다. 이는 인구 절반이 능력을 사장시킴으로써 사회 발전과 기업 경쟁력 등을 더디게 만드는 ‘퇴행의 끝판왕’을 부른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더 큰 경제성을 위해 여성 인력을 적극 활용하는 세계적 흐름에서 뒤처지는 것은 물론이다.
파시즘, 포퓰리즘과의 결합 양상도 우려를 더하는 대목이다. 여성주의가 눈에 보이는 실체가 되자 ‘남성 역공’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흐름이 가속화됐다. 전세계적으로 극우와 해로운 남성성(toxic masculinity)의 조합이 야기하는 문제가 부상하는 시점에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울프는 파시즘을 가부장제 독재의 극단적 형태라고 말하며 “공적 세계와 사적 세계는 분리될 수 없고 한쪽의 폭정과 예속은 다른 한쪽의 폭정과 예속”이라고 설명했다. 자유로운 한 명의 인간 주체로 살고자 하는 여성이라면 이러한 독재에 저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굳세어라 ‘한줌 여성’ 정치인이여
이런 가운데 여성 정치인 한 명 한 명의 존재는 너무나 소중하다. 우리나라의 여성 의원 비율(19%)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으로 아직 20%도 안되는 수준이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최소한의 임계질량(크리티컬 매스)이라는 30%에도 한참 못 미친다. 그럼에도 남성권력의 문제점이나 젠더 이슈에 대해 소신 발언하는 여성 의원들이 여야 가리지 않고 조금씩 생기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 중 단연 돋보이는 건 20대 정치신인 박지현 위원장이다.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을 공론화한 활동가이자 대학생 언론인이던 박 위원장의 정체성은 정치권이 끈덕지게 지워대던 페미니즘을 자연스럽게 주류 사회에 편입시키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냄으로써 정치 혐오에 빠졌던 여성 유권자들을 기적적으로 건져냈다.
그 결과는 지난 대선 때 무서운 기세로 이끌어낸 여성 표 결집. ‘0.7%포인트 격차’를 만든 일등공신인 그는 선거 후 민주당의 쇄신을 위해 파격적으로 비상대책위원장에 발탁됐다. “이 아저씨들 멱살 잡고라도 간다”는 각오에서 보듯 연일 당 내부의 고질적 온정주의,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 등에 쓴소리와 직언을 던져 단숨에 눈길을 끌었다. 이랬던 청년, 여성 정치인이 있었던가. 지금까지 봤던 청년정치와도 차원이 다른 ‘찐 MZ세대’의 패기에 정치적 감각까지 인정받는 모습이다.
박 위원장은 최근 민주당 강성지지자들로부터 비난 문구가 담긴 근조 화환을 받으며 정치인으로 신고식을 치르기도 했다. 쇄신을 위한 소신 발언을 ‘내부 총질’로 폄하하는 시선, 젊은 여성의 능력과 성취에 대한 열등감의 표출, 결코 유리하지 않은 지방선거 국면 등이 한데 섞여 가시밭길을 걷고 있지만 응원 세력도 만만찮다. 뚜껑 열어 보면 그를 비난하는 세력의 근거가 빈약할뿐 아니라 그 공격 자체가 민주당이 벗어던져야 할 ‘낡고 구태한 남성형 정치’를 그대로 소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조 화환 소식에 맞선 응원 화환이 곧장 제작되는가 하면, 여러 중진 의원들도 박 위원장의 용기 있는 행보를 높이 평가하며 혁신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이유다.
무엇보다 대선 이후 그가 끌고온 20∼30대 여성 지지자들의 ‘입당 러시’ 및 정당 활동은 이제껏 없었던 형태의 새로운 ‘여성 정치’ 신호탄을 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스스로를 “집토끼 아닌 호랭이”라고 칭하는 이들은 여성들이 팬덤을 넘어 정치 주체가 되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는 세대다. 아쉬운 대선 패배에 낙담하고 체념하기보다 ‘극복의 방식’으로서 정치 고관여층이 됐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진보와 보수가 각자의 여혐을 드러내며 경쟁할 때 마침내 여성들이 깨달은 것은 이념 정치가 아닌 ‘여성 정치’ 자체의 중요성이다. 남성권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힘을 얻는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진창길에 뛰어들지언정 직접 제손으로 구하겠다고 나섰다. 아직은 한줌인 이들의 수가 늘어나면 정말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여성 정치 세력이 확대되길, 이 한줌 불씨가 거대한 불길이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