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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여주인공
지친 삶 탈출 꿈꾸며 ‘추앙’ 요구
매순간 살뜰하고 따뜻한 응원 바라
나도, 당신들도 그 ‘마음’을 나누자

염미정은 경기도 산포시에 산다. 카드회사 계약직으로 일한다. 회사가 있는 강남까지 가려면 집 앞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당미역까지 가서 전철로 갈아타야 한다. 밝을 때 퇴근해도 집에 오면 밤이다. 저녁이 없다. 회식이라도 있으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울에 직장이 있는 언니, 오빠와 연락해 셋이 모여 택시를 탄다. 택시비는 만원씩 추렴한다.

“지쳤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그녀도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다. 이전엔 모임도 많았고 연애도 했다. 그런데 자신의 카드로 대출을 받은 남친이 대출금도 갚지 않은 채 연락을 끊고 전 여친에게 돌아가는 바람에 그 빚을 대납한 뒤부터 모든 일이 힘들어졌다. 그 (개새끼)는 알아봤던 거다, “돈 안 갚고 적반하장으로 굴어도 찍소리 못할 여자라는 걸.”

신수정 명지대 교수·문학평론가

사는 게 팍팍한가. 지난달 9일부터 방영을 시작한 JTBC 16부작 주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여주인공에게는 그래도 계약직이지만 직장이 있고 멀쩡한 가족이 있다는 점에서 당신보다 사정이 나을 수도 있겠다. 저가 싱크대를 만들어 파는 아버지가 배달도 가고 틈틈이 농사도 지으며 간신히 가족을 건사하는 삶. 휴일이면 온 식구가 밭에 나가 대파를 뽑아야 겨우 수지를 맞출 수 있는 그런 삶. 이 삶도 만만한 건 아니다. 어쩌면 미정은 한 번도 채워져 본 적이 없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욕망해 본 적도 없어 채워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여자일 수도 있다. 그런 그녀가 이제 해방을 꿈꾼다. 어디에 갇힌 건진 모르지만 뭔가를 뚫고 나가고 싶어 한다.

추앙. 그녀가 한겨울 내내 술만 마시던 정체불명의 외지인 남자에게 자신을 추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름도 모른 채 다만 구씨로 불리는 남자는 묻는다. 추앙, 어떻게 하는 건데. 미정이 말한다.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하는 범죄자나 외계인이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한자어 추앙(推仰)은 이리하여 한 번도 전적으로 다 줘본 적도 없고 또 전적으로 다 받아본 적도 없는 ‘사랑 불감증 세대’의 새로운 신조어가 됐다. 그들은 말한다. “사랑으론 안 돼, 날 추앙해요.”

왜 하필 추앙인가.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 이미 용도 폐기된 말을 그 말을 쓰지 않을 것 같은 곳에 가져다 둬 그 말의 본뜻을 탈각하고 전혀 다른 새로운 용도로 제안하는 것이 새로운 유행이 된 걸까. 말을 줄이고 줄여 첫 음절만 따 도무지 그 뜻을 짐작할 수 없는 낯선 말들을 만들어내는 데 지친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됐든 ‘나의 해방일지’에 의해 추앙은 더 이상 이전의 추앙이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소몰이하듯 어렵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사람들의 매 순간 매초를 채워주는 살뜰하고 따뜻한 눈빛과 조용한 등 두드림, 나란히 걷는 발걸음이 됐다.

어쩌면 추앙은 추앙을 그만둬야 진짜 추앙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창하고 허황한 거대담론에 기대 다수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는 어이없는 맹종만으로는 이제 추앙이 안 된다. 이제 각자 따로 추앙하자. 추앙의 개인주의를 실천하자. 당신이 마을버스를 놓칠까 뛰어, 라고 말해주는 마음, 만두를 먹는 당신 옆에 조용히 단무지를 놓아주는 마음, 그런 마음과 마음이면 안 될까. ‘나의 해방일지’가 제안하는 추앙은 바로 그런 것들 같다. 그런 마음과 마음만이 정녕 우리를 해방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나만의 마음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드라마를 추앙해 볼까 한다. 그러면 이 드라마가 이야기한 대로 한겨울 추위가 지나가고 다시 봄이 올 때쯤 우리는 지금의 우리와 완전히 다른 우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구씨가 묻는다. 추앙하면 정말 그렇게 되나. 미정이 확신하며 말한다. 나는 그렇던데. 나도 그렇기를 간절히 바란다. 당신을 추앙한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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