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에 동병상련의 정 표시… 나토 가입 내비쳐

“오랜 평화 속에 익숙해지고 자라난 우리 세대는 2020년대에도 권력정치와 전쟁이 유럽에서 엄연히 현실로 남아 있음을 새삼 깨달아야 했습니다.”
1985년 11월 태어나 현재 36세인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정상급 지도자로 통한다. 이른바 ‘MZ세대’에 속한 그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나’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하지만 지금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80여년 전 소련(현 러시아)한테 무력침공을 당한 핀란드과 고스란히 닮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힘’이 좌우하는 국제정치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냉철한 인식 아래 마린 총리, 그리고 핀란드 정부는 이제 나라의 진로를 새롭게 설정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재향군인의 날’ 맞아 러시아 비판… "정의 어긋나"
핀란드 언론에 따르면 마린 총리는 27일(현지시간) ‘재향군인의 날’을 맞아 대국민 연설을 했다.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으로 전격 중단된 핀란드 재향군인의 날 행사는 전 세계에 걸친 일상회복 본격화에 따라 2년 만에 부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 대륙에서 거의 70여년 만에 전면전이 발발하는 등 국제정세가 어두운 점을 감안한 듯 마린 총리는 전쟁 이야기로 기념사를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은 국제법에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의에도 어긋난다”며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인근 부차와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등에서 자행한 민간인 집단학살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다. “전쟁의 얼굴은 잔인하다”고 마린 총리가 말할 때 그의 음성은 심하게 떨렸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인 1939년 11월 소련은 영토 할양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이웃나라 핀란드를 전격 침공한다. 이른바 ‘겨울전쟁’의 시작이었다. 병력과 장비 규모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소련군이 순식간에 핀란드를 집어삼킬 것이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약 3개월에 걸친 핀란드 군인 및 민간인들의 영웅적 저항에 소련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며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입었다. 물론 총체적 국력의 열세를 견디다 못한 핀란드가 이듬해인 1940년 3월 소련에 항복하고 국토 일부를 내주는 것으로 전쟁이 끝나긴 했으나, 소련은 애초 목표였던 핀란드 정복을 완전히 포기했다.
◆우크라에 동병상련의 정 표시… 나토 가입 내비쳐
이날 마린 총리는 겨울전쟁 참전용사 등을 향해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자유로운 핀란드를 위한 희생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경의를 표했다. 그때의 핀란드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오늘의 우크라이나 국민, 그리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핀란드인의 생각은 우크라이나와 함께한다”며 동병상련의 정을 전하기도 했다.

겨울전쟁 패전 후 핀란드는 1940년대 후반부터 미국 등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소련 및 그 후예인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중립 노선을 내던지고 무기 제공을 비롯해 다각도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중이다. 마린 총리는 “이미 러시아에 가혹한 제재를 가하고 있고, 더 강력한 제재도 준비하고 있다”며 “잔혹한 공격이 계속되는 한 러시아와의 협력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핀란드의 나토 가입 가능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마린 총리는 “핀란드는 자신의 외교 및 안보정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며 “만약 우리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 경우 우리 혼자만 있어선 안 된다”가 말했다. 러시아가 80여년 전과 마찬가지로 핀란드 영토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나토 회원국이 되어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 강대국의 도움을 받는 게 필수적임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우리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지만, 또한 단호하고 지체 없이 행동해야 한다”고 밝혀 나토 가입을 둘러싼 결정이 임박했음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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