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밑바닥 자리 흑인이 계속 지켜
사실상 탈출 할 수 없는 기이한 체제
인도 세습적 신분제 ‘카스트’에 비유

카스트/이저벨 윌커슨/이경남 옮김/알에이치코리아/2만5000원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됐고, 생명·자유·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2대 대통령 존 애덤스 등 미국을 세운 ‘건국 아버지’들은 1776년 7월4일 발표한 독립선언서에서 이렇게 천명했다.
이는 미국이란 나라의 정체성이었고, 오늘날 세계 최강국이 되게 한 바탕이었다. 그런데 미국 실상은 건국 아버지들의 목소리와 정반대였다고, 오히려 400년 동안 백인 중심 지배층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악랄한 카스트 체제(신분제)를 구축해왔다고 고발한 책이 나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 여성으로 미국 언론 사상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이저벨 윌커슨이 쓴 ‘카스트(CASTE: The Origins of Our Discontents)’다. 경찰 과잉 진압에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숨진 사건으로 미국 내 인종갈등이 첨예하던 2020년 출판돼 최근 국내에 소개됐다.

‘뉴욕타임스’의 시카고 지국장을 지낸 저명 언론인이자 작가인 윌커슨은 미국 노예제가 1865년 폐지된 이후에도 사회 밑바닥에 자리했던 흑인들이 계속 그 자리를 지켜야 했던 ‘기이한’ 체제를 인도의 세습적 신분제인 카스트에 비유한다.
책에 따르면, 카스트 체제는 인간의 가치를 미리 정해진 서열에 따라 구축하는 인위적 구조물이다. 카스트가 사람들을 서열화된 집단으로 갈라 구별한 뒤 각자 지정된 위치를 지키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류 역사의 대표적 카스트 체제로 △사람들을 공포로 떨게 만들어 비극으로 치닫다가 진압된 나치 독일 △좀처럼 사라질 기색 없이 수백년을 이어온 인도 △드러나거나 언급되진 않지만 형체를 바꿔가며 존속해 온, 인종에 기반을 둔 미국의 카스트 체제를 꼽는다.
저자는 “이 세 카스트 체제는 특정 부류에게 열등한 족속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서열 밑바닥에 묶어둔 채 규칙대로 실행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비인간적 행위를 정당화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독일 나치, 인도와 다르게 자유 민주주의라는 표어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던 미국의 카스트 실체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미국에서 카스트가 어떻게 시작되고 그 틀이 어떻게 견고하게 다져지는지, 이 과정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상세하게 묘사한다. 수백년 전부터 벌어진 역사적 사실은 물론 본인 등 흑인들이 여전히 겪고 있는 무수한 사례를 덧댔다. 지배층이든 피지배층이든 백인이 흑인을 바라보는 고정관념과 일상에서 흑인들이 당하는 인간적인 모멸, 끔찍한 폭력 사례가 얼마나 심각한지 낱낱이 펼쳐진다.
저자는 미국 카스트 구조가 시작된 때를 400년 전 1619년 여름이라고 본다. 당시 아프리카인들이 처음 버지니아 식민지에 도착한 순간 백인 지배층이 평생 또는 한시적 노예로 삼을 자를 어떻게 구분할지 정교하게 다듬는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후 인종적 위계가 구축돼 분열의 기반을 이루는 미국의 하부구조로 작동하며 계급사회를 견고하게 떠받들고 있다. 그 폐해는 1932년 12월 나치의 카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달아난 천재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흑인들에 대한 처우는 최악의 질병”이라고 했을 정도로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1946년 “성숙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 이 나라의 문제가 새삼 부당하다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미국 건국 조상들의 원칙이 가소로워진다. 합리적인 인간이 그런(인종차별적) 편견에 그렇게 질기도록 집착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457∼458쪽)고 일갈한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카스트를 권력으로 인식했다. 카스트는 존중·권위·자격을 미리 전제하는 기준으로 누가 이 기준에 합당하거나 그렇지 않은 존재인지 규정하기 때문이다. 2008·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최초로 흑인(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고 재선에 성공하며 8년을 재임했지만 이 기간 탈인종 사회로의 큰 진전이 없었던 것도 카스트 장벽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또 2016년 대선 당시 많은 정치 분석가와 진보 진영 전문가가 미국 대통령 자질과 동떨어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다가 뒤통수 맞은 것 역시 카스트의 위력을 간과한 탓이 크다고 책은 말한다. “카스트가 미국의 모든 것을 설명하진 않지만, 카스트를 빼곤 미국의 어느 한 부분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저자는 “인류가 카스트 탓에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등) 이해할 수 없는 손실을 너무 많이 겪었다”며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카스트라는 메커니즘을 용인하고 방관한 이유도 크다. 시민이 무지에서 깨어나 용기 있게 행동하고 공감대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카스트가 없는 세상은 모두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며.
‘카스트’를 읽다 보면 한국 사회도 미국 사회 못지않다는 생각이 맴돌 수 있다. 빈부 격차는 극심하고, 이른바 ‘지배계급 지위’에 있는 사람 상당수가 기득권 수호·세습을 위해서라면 이념·진영 차이와 무관하게 한통속 같아서다. 정권과 상관없이 고위 공직자 인선 때마다 혀를 차게 하는 상황이 되풀이되는 이유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 입시 특혜 논란이 상징적 사례다. 윌커슨이 한국 실상을 알게 되면 어떤 카스트라고 규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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