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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20세기 현상?… 이미 11세기 시작됐다!

입력 : 2022-04-16 01:00:00 수정 : 2022-04-15 18:3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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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000년 무렵 바이킹, 신대륙에 상륙
中·아랍인, 페르시아만∼中 해로 통해 거래
교역품 일부는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이동

새 무역로 뚫리며 세계 연결되고 교역 시작
사람·물건 넘어 지식·종교도 대규모 전파
카이로·광저우선 반세계화 폭동 부작용도
저자 “생소함에 개방적 사람들이 좋은 결과”
발레리 한센 예일대 교수는 서기 1000년부터 세계가 연결되고 교역이 시작됐다며 세계화의 진정한 기원은 이 시기라고 주장한다. 이는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는 1492년부터 세계가 연결됐다는 기존 주장을 뒤집는 것이다. 사진은 12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그린 세계지도(왼쪽 사진)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바이킹 상상도. 민음사 제공

1000년/발레리 한센/이순호 옮김/민음사/2만7000원

 

실크로드에 관한 집필이 끝나갈 무렵, 역사가인 발레리 한센 예일대 교수는 중앙아시아의 카라한 왕조가 현재 신장 위구르 지역에 위치한 도시 카슈가르를 점령한 때가 중국 송나라가 북방 요나라와 ‘전연의 맹’을 체결하고 나서 불과 1년 뒤인 1006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조금 더 들여다보니 바이킹들이 캐나다 뉴펀들랜드 지역에 상륙한 것도 1000년 무렵이었다.

혹시 세 사건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한센은 이 시기 세 사건 배후에 지역 팽창이 숨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 시기야말로 세계화가 시작된 때였고, 전 세계에 통로와 무역로가 뚫려 사람과 상품, 기술, 종교가 새로운 지역으로 갈 수 있게 된 시기라는 것을.

그러니까 1000년 무렵, 고향 땅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뒤로 하고 아이슬란드를 거쳐 그린란드에 정착해 있던 바이킹 레이프 에이릭손과 그의 전사들은 래브라도해류를 타고 하나의 바위처럼 생긴 캐나다 북동부 배핀섬과 마르릴란드, 빈란드를 차례로 찾았다. 바이킹이 캐나다를 탐험함으로써 처음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몇 년 뒤, 레이프의 형제 토르발드 에이릭손이 빈란드를 찾았다가 보트 아래의 원주민 몇 명을 죽인 탓에 원주민들에게 화살에 맞아 숨졌다. 다시 얼마 뒤, 토르핀 카를세프니와 그의 부하들도 캐나다 북동부 해안으로 와서 양털 천을 주고 토착민들과 검은 모피 펠트를 교환하기도 했다.

발레리 한센/이순호 옮김/민음사/2만7000원제공

그럼에도 바이킹들은 북아메리카에 정착하지 않았고, 400년 동안 그린란드에만 머물렀다. 원주민 공격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교역으로 인한 이익이 당시에는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재나 희귀 모피, 화살촉 등 유용한 물품이 있긴 있었지만, 유럽 본토에 훨씬 좋은 물품이 많았다.

이때 대륙과 대륙을 연결한 것은 바이킹만이 아니었다.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들 역시 페르시아만에서 중국 해로까지 성지 순례를 가거나 물품을 거래했다. 교역품들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중국 남동해안 항구까지 빈번하게 왕래했고, 일부는 동아프리카 해안 항구들까지 이동했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항해했다. 기존 육로뿐만 아니라 해로를 통해서 아시아와 유럽, 유럽과 북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시아와 오세아니아가 연결됐다. 새로운 통로는 세계 각지를 하나로 묶어 주었고, 사람과 물건, 지식과 종교가 그 길을 따라 이동했다.

세계가 연결되자 풍요와 지적 풍부함, 신기술의 확산이 일어났고 사회 변화로도 이어졌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본업을 팽개치고 향신료와 향목 공급에 뛰어들 정도였다. 종교와 지식 역시 교류하고 대규모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뿌리인 키예프 루스 대공 블라디미르 1세는 로마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의 장단점을 검토한 끝에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였다.

물론 정치 문화적 분열이나 갈등 역시 생겨났다. 교역 격차가 발생하면서 카이로와 콘스탄티노플, 광저우 같은 도시에서는 신흥 부자들을 공격하는 반세계화 폭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울러 기존 체제 역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서기 1000년 무렵 세계 모습을 개괄하면, 동아시아에서는 송나라가 중국 남쪽으로 밀려나 있었지만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만주 지역에선 요나라가 급성장했다. 중동에는 아바스가 힘겹게 제국을 유지하고 있었고, 동유럽에선 비잔티움 제국이, 서유럽에선 각종 제후국이 중세 시대를 이어왔다. 세계 인구는 2억5000만 명이었고,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은 약 1억명의 중국이었다. 프랑스 파리 인구는 2만∼3만명, 스페인 코르도바는 45만명인 데 반해, 송나라의 카이펑(개봉)과 항저우(항주) 인구는 최소 100만명이었다.

하지만 다시 500년 뒤, 대포와 총 등 첨단 무기로 무장한 유럽인들이 1000년 무렵 열린 기존의 무역로에 진입해서 세계사를 재편했다. 1492년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바하마 제도와 쿠바, 아이티에 도착한 것이 그 시작점이 됐다. 유럽인들은 1492년 이후 세계를 전면적으로 연결하고 기존 네트워크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개조했다.

지난 30년간 동서양간 문명 교류사를 연구해 온 한센 교수는 많은 사료와 논거를 바탕으로 서기 1000년부터 세계가 연결되고 교역이 시작됐다며 세계화의 진정한 기원은 이 시기라고 대담하게 주장한다. 이는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는 1492년부터 세계가 연결됐고, 작금의 세계화 역시 20세기에 시작된 현상으로 이해하는 기존 학계의 이론을 뒤집는 파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그러면서 서기 1000년에 일어난 세계화와 교류는 콜럼버스가 제1차 항해를 시작한 1492년의 세계화와 달랐다며 그 차이 역시 분석한다. 먼저 1492년의 유럽인들은 화포와 대포를 갖고 그들이 만난 사람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던 반면, 1000년의 여행자들은 과학기술적 수준이 엇비슷해 그럴 수 없었다. 아울러 교역의 주체도 달랐다. 1492년의 유럽인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을 압도한 반면, 1000년 무렵 교역을 주도하고 호황을 누린 이들은 대체로 중국이나 중동 사람들이었고 유럽인들은 오히려 뒤처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1000년 세계화 사례를 분석하면서 선조들에게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생소함에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배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생소함에 개방적인 사람들이 새것에는 무조건 손사래를 친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1000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373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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