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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아침은 생각한다』 문태준 “잠시 푸설푸설 내리던 눈 같았으면”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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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3-23 07:30:00 수정 : 2022-03-22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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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내려오기 전이던 7, 8년 전부터 조천읍 선홀리의 동백동산을 찾기 시작했다. 동백동산은 수십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한 뒤 흘러내린 용암 덩어리와 나무들과 덩굴식물이 오랜 세월 눅진하게 뒤섞여 만들어진 곳으로, 그 곳에는 작고 뭉툭한 동백나무뿐만 아니라 키가 큰 종가시나무나 감탕나무, 먼나무 등 낙엽 활엽수도 적지 않았다.

 

어느 날, 다시 찾은 동백동산에 바람이 불었고, 키가 큰 나무들이 전후좌우로 흔들렸다. 바람이 멈추자, 나무들 역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아주 천천히. 그때 불현 듯 시가 다가왔고, 시인 문태준은 펜을 들었다.

 

“바람이 있을 때에 키 큰 나무가 기둥째 기우는 것을 며칠 마음 놓고 본다// 어제는 왼편으로, 오늘은 바른쪽으로 나무는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서, 그러나 바람에 따라 부드럽게 기운다//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을 적에도,/ 비스듬히 기운 나무는 서두름이 없이 천천히 바람을 벗고 제 자세로 돌아간다”(「바람과 나무」 전문)

 

마음을 흔든 그 나무들이 동백나무가 아닌 어떤 수종이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시가 다가온 순간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람이 오면, 나무는 바람을 받고 비스듬하게 기웁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그치면 천천히 제 자리로 돌아오지요. 우리는 나무를 자주 보는데, 나무의 이러한 회복하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 역시 천천히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요. 천천히 제 자리를 찾는 나무처럼. 그런 걸 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간결한 언어와 투명한 이미지로 현대 서정시의 한 진경을 이뤄온 문태준 시인이 4년 만에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유심작품상과 소월시문학상 등에 이어 최근 목월문학상과 정지용문학상을 연거푸 수상하면서 시단의 실력파로 자리 잡은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으로, 이번 시집 역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의 아늑한 풍경을 그만의 간결한 필치로 담아냈다.

 

문태준은 이번 시집에서 무엇을 담고 무엇을 혁신했을까. 무슨 매력이 있길래 시단과 독자들은 그의 서정시에 늘 주목하는 것일까. 제주 애월읍 장전리의 중산간 마을에 자리 잡은 문 시인을 지난 17일과 18일 전화로 만났다. 첫날 목소리는 다소 어눌한 듯했지만, 둘째날 아침 목소리는 다시 맑아졌다.

먼저 표제작 「아침은 생각한다」는 아침 언저리의 풍경을 깊이 있게 성찰하면서도 아름답게 형상한 시로, 이경수 평론가는 팬데믹 시대에 “지속 가능한 삶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평했다.

 

“아침은 매일매일 생각한다/ 난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어선은 없는지를/ 조각달이 물러나기를 충분히 기다렸는지를/ 시간의 기관사 일을 잠시 내려놓고 아침은 생각한다/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룬 사람의 깊은 골짜기를/ 삽을 메고 농로로 나서는 사람의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함지를 머리에 이고 시장으로 가는 행상의 어머니를/ 그리고 아침은 모스크 같은 햇살을 펼치며 말한다/ 어림도 없지요, 일으켜줘요!”(「아침은 생각한다」 부문)

 

―시 속의 아침 풍경이 아스라하면서도 깊다.

 

“제주에 와서 살게 되면서 아침 시간이 확실히 많아진 것 같다. 시골이기 때문에 하루 일이 시작되는 게 훨씬 빠르다. 특정한 계기로 쓴 것은 아니다.”

 

시집에는 시인의 제주 생활 편린도 담겨 있다. 시 「종소리」에는 낮에는 제주 시내에서 일하고 저녁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시인의, 해질 무렵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들으며 ‘목깃이 까매진 저녁’을 씻는 그의 일상이 엿보인다.

 

“해 질 무렵이면 종소리가 옵니다 내 사는 언덕집에 밀려와 곱게 부서집니다 나는 이 종소리를 두고 숨어 살 수가 없어 손 놓고 아무 데나 걸터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종소리를 듣고 있으니 낮에 보았던 무덤 생각이 났습니다...며칠 전에는 종소리가 오는 곳을 찾아 나섰다가 도중에 길머리에서 돌아왔습니다 종소리는 목깃이 까매진 나의 저녁을 씻깁니다 그리고 종소리는 내내 남아 잠든 아이의 방을 둘러보고 가는 어머니처럼 나의 혼곤한 잠 속을 맴돌다 갑니다”(「종소리」 부문)

 

―종소리가 담는 풍경이 묘한 느낌인데.

 

“시 「항아리」와 함께 제주에 와서 새롭게 느낀 시라고 할 수 있다. 성당의 종소리이건, 절에서 오는 종소리이건 뭔가 숙연한 느낌이 있다. 우리가 여러 가지로 번잡하게 생활하고 활동하지만, 종소리가 그것을 걷어서 묶는 느낌이 든다. 저에게 약간 특별했던 것 같다.”

 

세 살 무렵 다섯 살 많은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낮은 노래를 듣던 기억을 담은 「첫 기억」을 비롯해 큰어머니와의 추억 등 오랜 기억 역시 담겨 있다.

 

“가난한 식구 밥 해 먹는 솥에/ 빈 솥에/ 아무도 없는 대낮에/ 큰어머니가/ 빈 솥 한복판에/ 가만하게/ 내려놓고 간/ 한 대접의 밥”(「낮달을 볼 때마다」 전문)

―왜 낮달을 보고 큰어머니의 밥을 떠올린 것인지.

 

“큰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다. 큰어머니는 어릴 적 우리가 잘 살고 있나, 하고 걱정하면서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살펴줬다. 애틋한 게 많은 어른이다. 밥도 놓고 가고, 솥안에 먹을 것을 놓고 가기도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다. 이전 시집 『가재미』에도 큰어머니에 대해 많이 썼다.”

 

시집에는 노곤한 몸을 이끌고 식당을 찾은 넝마주의 남성과 그를 맞는 주인의 정겨운 모습을 차분하게 그린 시 「밥값」을 비롯해 현대의 서늘한 풍경 역시 투명하게 담겨 있으니.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을 한술 막 뜨고 있을 때 그이가 들어섰다/ 나는 그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수레에 빈 병과 폐지 등속을 싣고 절룩거리며 오는 그이를/ 늦은 밤 좁은 골목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이는 식당 한편 벽에 걸린 달력의 28일을 오른손으로 연거푸 짚어 보였다/ 무슨 말인가를 크게 했으나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식당의 여주인은 조금도 언짢아하는 기색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짧은 시간 후에 그이의 앞에 따뜻한 밥상이 왔다”(「밥값」 전문)

 

―시 속에서 남성이 28일을 가리키는 의미는.

 

“아마 그분이 그때 밥값을 주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이 장면을 본 것인지) 오래 전 서울에서 저도 밥 먹으로 갔다가 그 장면을 봤다. 그분을 오래 동안 봐왔다.”

 

―8번째 시집인데, 무엇이 새로워졌을까.

 

“이번 시집에는 예전 시집과 다르게 바다가 조금 들어온 것 같다. 한국시에서는 바다 이미지가 강하지 않다. 바다가 너무 망망해서 그럴 것이다. 늘 바다를 보니까 바다에 대해 뭔가를 얻어서 쓸 얘기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집 가운데 「수평선」, 「대양」 등이 그것이다.”

 

바다의 감각과 정서는 내륙 출신인 시인뿐만 아니라 한국시에서도 역시 그리 흔하거나 깊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새롭게 들어온 바다의 정서나 감각을 담은 시들은 귀하지 않을 수 없다.

 

“내 가슴은 파도 아래에 잠겨 있고/ 내 눈은 파도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과 마주 앉은 이 긴 테이블/ 이처럼 큼직하고 깊고 출렁이는 바다의 내부, 바다의 만리// 우리는 서로를 건너편 끝에 앉혀놓고 테이블 위에 많은 것을 올려놓지/ 주름 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을”(「수평선」 전문)

 

 

 

휴가를 마치고 군부대 복귀를 서두르던 이등병 문태준은, 시인 황지우의 시집을 예리한 칼로 긋기 시작했다. 시집 속에서 읽고 외우고 싶은 시들을 낱장으로 오린 뒤, 스카치테이프로 자신의 몸에 촘촘하게 붙였다. 그 위로 속옷이며 군복을 걸쳐서 감쪽같이 숨겼다.

 

그는 이렇게 부대 안으로 가져간 시들을 주머니에 한 장씩 담고서 화장실에 들어가서 조용히 읽곤 했다. 아직 이등병 ‘쫄다구’ 신분인데다가, 1991년 당시엔 여전히 부대 안에서 편하게 책을 읽은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군 생활 내내 부지런히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이 이야기는 한국 시단에서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1970년 김천에서 태어난 문태준은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 〈처서(處暑)〉외 아홉 편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동대학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차례로 받았다.

 

―어떻게 문학의 세계, 시인의 길로 들어선 것인가.

 

“(중고등학교 때) 산문들을 쓰기도 했지만,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는 시를 쓸 줄 몰랐다. 대학에 들어가서 신경림, 김용택, 고재종, 안도현 시인 등의 시를 읽으면서 할 말이 있을 수 있겠구나, 나도 이런 선생님들의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시가 되는구나, 시의 꼴이 되는구나, 하는 것은 이런 분들을 통해서 배웠다.”

 

등단 이후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창작과비평사, 2000), 『맨발』(창비, 2004),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그늘의 발달』(문학과지성사, 2008), 『먼 곳』(창비, 2012),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 2015),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 등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불교방송 PD로 일하고 있다. 2016년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그는 자신의 시 세계를 이렇게 소개한 바 있다.

 

“제 초기 시는 농촌의 토속적인 풍경, 시골 사람들의 생활경험, 샤머니즘 그리고 환생 같은 영적인 부분들을 많이 다루었다. 그리고 농촌 사람들의 노동조건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 시들이 있다. 그러고 나서는 주로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자연 그리고 생명과의 관계들 말이다. 또 병이 오는 문제 그리고 누군가가 이 삶의 공간으로부터 떠나가는 헤어짐의 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서울국제작가축제, 2016.8)

 

―불교방송 일을 하고 있는데, 시 창작에 어려움은 없는지.

 

“그런 건 없다. 많은 글을 쓰는 것은 아니어서, 이러저러할 때 시가 생겨난다. 일할 때도 생겨나고, 집에 가서 자다가도 생겨나고, 주말 여유가 있을 때도 시가 생겨난다.”

 

2년 전, 시인은 가족과 함께 제주로 이사 왔다. 첫 해는 ‘광평빌라’에서 연세(年歲)로 살았고, 지난해 8월 아내가 태어나 살았던 중산간 마을 제주 애월읍 장전리의 생가터에 지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는 귤과 한라봉 몇 그루를 일구고, 한라산과 애월 바다가 보이는 ‘오롬마르’라는 카페도 열었다.

 

―어떻게 제주에 오게 된 것인가.

 

“아내가 제주 사람이어서, 제주에 정착하기 전에도 자주 왔다. 아내가 태어난 곳이 폐가 상태로 있었는데, 거기다 새로 집을 짓고 들어온 것이다. 좋다.”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은지.

 

“어떤 시를 쓸진 잘 모르겠다. 지금 제주에 살고 있으니까 제주에 있는 생명력 이런 것들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제주에 이주해 왔거나 제주에서 살았던 예술가들이 제주를 어떻게 봤는지 등을 같이 보고 있다.”

 

제주 앞바다의 파도는 누군가의 마음을 거세게 뒤흔든 뒤 다시 자신의 집으로 표표히 돌아갈 게 분명하지만, 문태준의 서정시는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 그 종착지는 어디일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많은 독자들이 그의 시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건, 그가 늘 어딘가에서 “서성”이며 시적 갱신을 지속적으로 시도할 것이라는 기대와, 스스로는 자신의 시가 스르륵 녹아,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길 소망하고 있다는 시인의 희망 때문일 것이다. “제 시들도 스르륵 녹아 없어지듯이, 없었던 것처럼, 되면 좋겠다”는 눈을 닮은, 이중의 시 정신이 서늘하다. 시 「설백」처럼.

 

“흰 종이에/ 까만 글자로 시를 적어놓고/ 날마다 다시/ 머리를 숙여 내려다본다// 햇살은 이 까만 글자들을 빛의 끌로 파 갈 것이니// 내일에는/ 설백만이 남기를// 어느 때라도/ 시는/ 잠시/ 푸설푸설 내리던/ 눈 같았으면”(「설백」 전문)

 

참고문헌

 

―서울국제작가축제(2016.8). 「시인 문태준 “나의 경험에서 시가 움틀 때”」. 『채널예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문태준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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