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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놀이, 정리, 그리고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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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3-11 22:57:35 수정 : 2022-03-11 22:57:34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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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하위징아
놀이는 업무역량 높이는 것 아닌
독립적인 인간의 창조행위로 봐
분해·합성 의미에서 예술과 같아

낱말의 뜻을 익히는 훈련으로 어릴 적 쪽지시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문제가 있었는데, 비슷한 말과 반대말 찾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문제는 각 문항마다 정답이 여럿 있어야 정상이 아닐까 싶다. 다층위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한 단어가 다른 단어와 일대일 대응으로 짝 지워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공부’의 반대말이 뭐냐고 물으면 학생들은 ‘휴식’ 또는 ‘놀이’라고 쓸 것이다. 그렇다면 ‘놀이’와 ‘휴식’은 비슷한 개념이고, ‘놀이’의 반대말은 ‘공부’일까?

놀이의 인간, 호모 루덴스(home ludens)는 도구의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대두되었다. 도구의 인간 가설에서는 놀이를 업무 역량을 증대시키는 데 필요한 부수적인 활동으로 간주한다. 일이나 공부와 같은 합리적 목적에 적합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놀이마저도 근로활동을 보완한다는 차원에서 다음 일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한 휴식의 일환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저술서 ‘호모 루덴스’(1938)에서 놀이를 업무와 별개로 파악한다. 놀이는 어떤 것을 보조하는 목적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인간의 창조행위라는 것이다.

이주은 건국대 교수·미술사

창의성과 관련시켜 이해되는 놀이란 원래 있던 무언가를 분해시키고, 그 조각들을 다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결합한다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가령 조립 형태의 장난감을 대표하는 레고(LEGO)는 덴마크어로 ‘잘 놀다’라는 뜻인데, 여기에는 라틴어로 ‘합치다(put together)’의 의미도 있다.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새로운 모양을 탄생시키는 것이 놀이의 개념 속에 들어있는 셈이다.

오래전에 나는 ‘놀이’의 반대말은 공부가 아니라 ‘정리’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온 날이면, 저녁에 반드시 어머니가 “놀았던 것 좀 정리해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방바닥에 널려 있던 장난감과 문구용품, 그리고 무엇에서 나왔는지 모를 크고 작은 상자나 주머니 같은 잡동사니들을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해서 제대로 복귀시키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놀이 후 어지럽힌 흔적을 없앤다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늘 물건들을 보기 좋게 나란히 줄지어 놓거나, 눈에 띄지 않게 깨끗이 치워두었다. 어린 시절 내게 ‘정리’와 비슷한 말은 ‘청소’였던 것이다.

구석 어딘가에 놔둔 물건을 다음에 다시 찾을 수 없게 되는 일을 경험하면서, 차츰 내게 정리의 개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용도끼리, 비슷한 크기끼리, 때로는 비슷한 재료끼리 내 물건들을 분류해보면서 개선된 방식을 찾게 되었고, 어느덧, 정리의 신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체계적으로 정리된 방의 소유자가 돼 있었다.

효과적인 정리를 위해서는 물건들을 함께 묶어둘 범주를 갖추는 것이 중요했다. 범주가 생기면 물건들은 지정된 자리를 가지게 되고, 새로 들여온 물건일지라도 선반 어느 구석에 놓을지 위치가 정해진다. 말하자면 정리는 머릿속에 물건 정보를 공간화해서 저장하는 작업이라고 할까.

17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럽에서는 분류학이 발달하게 된다. 아마 분류학자는 여기저기서 모은 희귀한 물건들이 방에 한 가득 쌓여서 어떻게 정리할지 골머리를 앓던 수집가이기도 했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방에 질서를 부여하고 재배열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수집품을 이쪽저쪽으로 옮겨 분류하고 자료를 축적해갔던 수집가들의 방이 오늘날 박물관의 기원이라고 한다.

내 취미는 박물관·미술관 관람이다. 어느 기획자가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잘 정리해 놓은 소장품들을 즐겁게 구경하는 취미는 정리에 대한 나의 일상철학에서 운명적으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정리란 물건을 범주화하여 그룹별로 한데 합치는 것이다. 합친다는 차원에서 정리는 놀이와 반대말이 아닌 비슷한 말이다. 만약 하위징아에게 놀이와 비슷한 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예술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쪽지시험에는 나오지 않겠지만, 놀이, 정리 그리고 예술은 모두 비슷한 말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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