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방화범 절반가량 ‘우발적’ 범행
범행 동기 ‘특정인·사회에 불만’ 많아
범죄은닉·신변비관에 충동 따른 ‘無동기’도
전문가 “강릉 방화범, 불 질러 불만 해소
사람 공격보다 은폐 쉽다고 생각했을 것“

‘축구장 5602개, 여의도 면적 13.8배’
지난 5일 새벽 강원 강릉시 옥계면에서 시작돼 삽시간에 강릉·동해시 일대를 불바다로 만든 산불로 인한 산림 피해 추정치(4000㏊, 8일 오전 11시 기준)다. 이 산불은 60세 남성 A씨가 토치를 이용해 자신의 집과 빈집에 불을 지른 것이 발단이었다. A씨는 불이 인근 산림까지 번지도록 내버려뒀고, 결국 화마가 강릉·동해지역 일대를 집어삼키면서 주택·건물 피해가 속출했다. A씨의 어머니도 대피하던 중 넘어져 숨졌다.
자신의 가족까지도 잃게될 만큼 결과를 통제하기 힘든 범죄 중 하나가 방화다. 그는 왜 불을 질렀을까.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주민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이를 토대로 보면 A씨의 방화는 ‘중장년층·남성·보복’ 범죄로 분류된다. 이 세 가지는 방화범 관련 통계 및 연구조사에서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유형이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방화 범죄’를 이 세 가지만을 갖고 완전히 해석해내기는 쉽지 않다. 전문가 분석과 관련 연구를 종합해보면 방화범들은 개인적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불을 지르거나, 심지어 동기도 없이 충동적으로 범행에 나서는 등 다양하고 복잡한 행태를 보인다.

◆해마다 1000건 이상 발생하는 방화…불특정 다수에 막대한 피해
8일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방화사건은 최근 3년간 해마다 1000건 넘게 발생했다. 2020년은 1210건으로, 2018년 1478건, 2019년 1345건에 비해 그나마 감소한 수준이다.
방화는 살인·강도·강간 등과 함께 강력범죄로 분류된다. 특정인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 발생한 방화사건 중 피해자가 상해를 입거나 사망한 사례(방화치사 및 방화치상)는 33건에 달한다. 산림 방화처럼 폐쇄회로(CC)TV가 충분히 설치돼 있지 않은 곳에서 범행이 이뤄질 경우, 범죄자를 특정해 붙잡기도 쉽지 않다.
통계상으로는 A씨처럼 ‘중장년층 남성’이 방화를 저지르는 사례가 대다수다. 대검의 ‘2021 범죄분석’을 보면, 2020년 검거된 방화범 10명 중 8명(83.9%)이 남성이었다. 연령별로는 ‘51∼60세’가 29.7%로 가장 많았고, ‘41∼50세’(21.8%), ‘61세 이상’(15.9%), ‘31∼40세’(12.4%) 등이 뒤를 이었다. 최근 3년으로 통계치를 넓혀도 남성이 83.7%로 대다수이며, 연령대는 ‘51세∼60세’(29.3%), ‘41세∼50세’(23.6%) 등의 순이었다.
범행 동기는 ‘우발적’이 44.6%로 절반에 육박했다. 이어 ‘기타’(20.8%), ‘미상’(15.6%), ‘현실불만’(7.0%), ‘가정불화’(5.3%), ‘호기심’(2.8%), ‘부주의’(1.9%) 등으로 나타났다.

◆“비연쇄방화범 ‘보복하려고’…연쇄방화범은 ‘스트레스 해소’”
‘우발적’이라는 단어 하나로 방화범죄를 설명하기엔 다소 부족하다. 방화범들을 대상으로 한 관련 연구에선 보복과 범죄은닉, 스트레스 해소 등 좀 더 구체적인 동기가 거론된다.
‘한국 방화범죄의 유형과 연쇄 방화의 예측요인’ 연구(2020년, 권혁준 영남대 심리학과 석사과정·김성혜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과 범죄분석요원·서종한 영남대 심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비연쇄방화범들은 ‘보복’이 범행 동기인 사례가 가장 많았다. 이 연구는 2006년부터 2016년까지 경찰청 과학적범죄분석시스템(SCAS)에 등록된 135명(비연쇄방화 79건, 연쇄방화 56건)의 방화범죄자 면담·분석보고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보복 동기 방화’ 27.4%, ‘범죄은닉 동기 방화’ 14.1%, ‘무동기’(단순 충동 또는 동기를 따로 표출하지 않은 경우) 11.8%, ‘반달리즘 동기 방화’ 5.1% 등이었으며, ‘연쇄방화’는 41.4%를 차지했다.
연구진은 특정인과의 관계에서 불만 등이 생겼을 때 복수를 위한 수단으로 불을 지르거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갖고 공공시설 등에 불을 지른 경우를 보복 동기로 분류했다. 반달리즘 동기 방화는 개인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을 질렀거나, 자신의 신변을 비관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불을 질렀다고 응답한 경우에 해당한다.
연쇄방화범들만을 놓고 분류했을 때에는 반달리즘 동기 방화가 가장 많고, 보복 동기, 무동기, 범죄은닉 동기 방화 등이 뒤를 이었다. 범죄은닉·보복에 의한 방화범은 ‘거주지’를 방화 장소로 선택하는 비율이 높고 반달리즘 방화범은 ‘차량’, 연쇄방화범은 ‘공공장소’, 무동기 유형은 ‘상점·상업 건물’에 불을 지르는 비율이 높았다.
통상 방화범은 정신질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연구 결과 정신질환의 영향으로 방화를 저지른 ‘병적 방화유형’(무동기로 분류)은 3건에 불과했다. 대검찰청 통계에서도 2020년 검거된 방화범 가운데 정신장애가 있는 경우는 14%였다. 범행 시 정신상태가 ‘정상’인 경우가 44.3%였고, 술에 취한 상태가 41.7%에 달했다.
다만 연구진은 “한국 사회가 아직까지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고, 따라서 병원을 찾지 않는 비율이 높기 때문인 것일 수 있다”면서 “이를 확인하기 위해 보다 더 정교하고 많은 집단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강릉 방화범, 방화광(狂)보단 분노좌절형”
강릉·동해시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A씨 경우는 본인에게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는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보복 동기 방화로 보인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A씨와 같은 경우는) 방화광이 아니라 분노좌절형으로 볼 수 있다”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 자신의 인생에 대한 불만, 자신의 처지·상황에 대한 불만을 불을 지름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 교수는 “불을 지르면 사람을 공격하는 것보다는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A씨는)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자기가 온 산에 다 불을 질러야 하는 게 아니라, 조금만 지르면 알아서 타는 만큼 죄책감도 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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