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인생 읽으며 내 삶 반추
마일리 멜로이, <트레비스 B>(‘지금 두 가지 길을 다 갈 수만 있다면’에 수록, 강정우 옮김, 책세상)
쳇 모랜이란 청년은 사랑을 해 본 적도 없고 그럴 기회도 갖지 못했다. 회복되긴 했지만 소아마비에 걸린 적이 있어서 걸을 때 불편하고, 목장에서 일한다. 스물한 번째 생일에 난로 앞에서 수프를 데우다가 그는 생각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가는 자기 안의 어떤 끔찍한 것이 풀려 튀어나올 것만 같다고. 춥고 고독한 어느 겨울밤, 청년은 차를 몰고 시내를 돌다가 불이 켜져 있는 교실을 발견한다. 춥고 고독할 때 따뜻해 보이는 불빛을 따라 어딘가로 들어가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곳이 어디인지 잘 모르고 거기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면서도 무엇엔가 이끌린 듯.

그 밤의 교실로 법대를 막 졸업했으나 학자금을 갚느라 동네 선생님들에게 학교법을 강의하러 먼 데서 온 베스 트레비스가 걸어들어온다. 모르는 사람들 속에 앉아 있다가 쳇 모랜은 지치고 불행해 보이는 강사를 보며 오늘 밤은 다른 밤과 다르다고 깨닫는다. 여느 사랑이 시작된 순간처럼.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마치면 트레비스는 9시간 반 동안이나 운전을 해서 직장이 있는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변호사들과 도시의 세상에서 사는 그녀, 건초와 말과 소의 세상에서 사는 그. 어느 날 다른 강사가 교실로 들어오고, 고관절 때문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되는 쳇 모랜은 아홉 시간 반을 운전해서 그녀의 직장으로 찾아간다.
이 단편소설의 제목은 <트레비스 B>. 작중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붙이는 명명법(命名法)은 독자에게 인물을 깊이 각인시킬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갖고 있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읽고 난 후에도 어딘가에 계속 그 인물이 살아있다고 느껴진다면 그 픽션은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니까. 아무튼 나는 꽤 오랫동안 이 단편의 제목이 왜 <쳇 모랜>이 아니고 <트레비스 B>일까 궁금해했다. 사람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아직 모르고, 어렵게 찾아간 트레비스에게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그의 이름이 아니고.
사랑이라고 잘못 알았던 감정 때문에 아프게 한 시절을 보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 나를 그렇게 만든 그 대상 때문에 남은 날들을 내다볼 수 있게 한. 그러므로 결국 남의 시선으로 나 자신을 보는 게 아니라 온전히 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게 되었던 짧고 빠르게 지나간 오해의 경험. 이제 사랑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며 그렇게 한 번 더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을 한다. 달빛 아래 쳇 모랜이 그녀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둥글게 구겨 멀리 던져버릴 때.
얼마 전 19세기 서부개척시대 두 남자의 우정을 그린 <퍼스트 카우>를 만든 여성 영화감독 켈리 라이카트가 이 <트레비스 B>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마일리 멜로이의 단편들을 엮어 만든 영화 <어떤 여자들>에서 쳇 모랜은 여성 인디언으로 각색되었다. 그래서인가 가슴 아픈 정도로 보면 영화가 더 그렇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은 여전히 책 속에 있고. 이 소설집의 원제는 ‘두 가지 모두 내가 원하는 유일한 길이다’(Both ways is the only what I want it). 제목에서부터 그렇듯 11편 모두 인물의 흔들리는 욕망, 일상 아래 고요히 끓어오르는 열망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 책으로 ‘미국 문단을 이끌 최고의 젊은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단편소설의 근원은 서정성이 아닐까. 장편과 달리 눈에 띄는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길이가 짧은 단편에서 이야기가 움직이고 흘러가는 힘은 등장인물이 가진 감정 때문이다. 감정은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니까. 이야기가 끝날 때 그 보편적인 감정이 독자에게 새로운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 바로 그것이 단편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앉은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으며 타인의 삶을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장르. 격주로 이 지면을 통해서 보다 많은 독자에게 가 닿기를 바라는, 이거 정말 좋은 소설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단편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 한다. ‘토요일엔 단편소설’이라는 순정의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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