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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얽매이지 않고 10년 후 책 한 권 이상 쓴 작가 되고 싶어요”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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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2-09 06:00:00 수정 : 2022-02-09 00:41:43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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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이민자 출신 재미 소설가 엔지 김

1980년 가족과 美 이민… 삶의 행로 급변
낯선 나라에서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버드대 로스쿨 졸업… 법정 변호사로

휴가지서 소설 완독 후 참 행복 깨달아
변호사 그만두고 글쓰기 ‘새로운 경험’
한국인 이민자로 보낸 어린시절 영감

2019년 ‘미라클 크리크’ 출간 베스트셀러에
타임 등 유명매체에서 ‘올해의 책’ 선정
2020년 에드거상 등 수많은 상 휩쓸어
한국인 이민자로서 정체성과 경험을 풍성하게 담은 첫 소설 ‘미라클 크리크’를 펴내 큰 화제를 낳고 있는 엔지 김은 자신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다는 소식에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는 꿈”이 실현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엔지 김이 해외에서 출간된 판본에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엔지 김 제공

멀리 태양을 향해 까르륵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갈매기 떼, 그 갈매기들 아래에서 정념의 격정처럼 육지를 향해 쉼 없이 몰아치는 하얀 파도, 파도의 꽁무니를 따라와선 쏴쏴 하며 울려대는 파도의 소리… 태평양이 내다보이는, 손님이 거의 없는 식당에서 와인을 마시면서 톰 오브라이언의 소설 ‘숲속의 호수(In the Lake of the Woods, 1994)’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법정 변호사로 일하던 20대의 어느 날, 어려운 사건 세 건을 연달아 맡아서 힘겨운 몇 달을 보낸 뒤 휴가를 내고 남편과 샌프란시스코에 갔다. 태평양이 보이는 곳에서 실험적인 구조를 가진 매력적이고 복잡한 소설에 빠져든, 완벽한 하루였다.

“정말 좋았어요. 변호사가 된 이후에 (일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죠. 그날 저는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인생 전체에서 저를 만족시킬 뿐 아니라 매일매일 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을 찾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이후 매킨지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고, 거기서 만난 동료와 닷컴 회사를 차렸으며, 다시 회사를 매각한 후에는 전업주부가 됐다. 지금은 모두 건강하지만, 어렸을 때에는 세 아들 모두 각자 병을 앓고 있어서 자주 병원에 가야 했다. 가정주부는 그동안 해온 일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운 직업이었고, 주부의 모든 일은 버거웠다.

어느 날, 동네 홀푸드마켓에서 갑자기 울음보가 터져버렸다. 마침 한 친구가 울고 있는 그를 보고 다가와서 안아줬고, 그는 그동안 겪은 일들을 친구에게 모두 털어놨다. 그는 이때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그날 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끄집어내고, 머릿속에서 정리할 수 없던 복잡한 생각을 풀어내는 걸 도와주는.

“저는 글쓰기를 곧바로 사랑하게 됐어요. 자유롭게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죠. 처음으로, 그동안 바로 이 일을 찾아 헤맨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다른 직업들과 달리 예술적으로 지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나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일을.”

글쓰기에 매료된, 한국인 이민자 출신인 엔지 김은 자신의 첫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첫 소설이었기에, 어릴 적 미국 볼티모어로 이민을 온 자신과 가족의 삶과 경험이 적지 않게 담겼다. 소설을 다 쓰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흠, 어쩌면 그냥 습작은 아닐 수도 있겠는데.

엔지 김의 장편소설 ‘미라클 크리크’(문학동네)는 이렇게 우리 곁으로 올 수 있었다. 소설은 버지니아의 작은 마을 미라클 크리크에서 한국인 이민자 가족 유씨가 운영하는 고압산소 치료시설 ‘미라클 서브마린’의 산소탱크가 폭발해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시작한다. 화재는 단순 사고가 아니라 담뱃불에 의한 의도적인 방화라는 결론이 나고, 사망한 아이의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방화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기소된다. 나흘간의 살인 재판을 따라가면서 그날 정말로 무슨 일어났는지 서서히 밝혀지고, 마침내 삶과 세상의 누추한 비의가 하나둘씩 벗겨지는데.

작품은 2019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아울러 ‘타임’, ‘워싱턴포스트’ 등 유명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것은 물론 2020년 에드거상, ITW스릴러 어워드, 스트랜드 크리틱스 어워드 등 수많은 상을 휩쓸었다. 이미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20개국에서 번역 출간됐다.

이 놀라운 소설은 도대체 어떻게 탄생했을까. 11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비범한 작가의 문학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갈까. ‘장님 코끼리 만지기 격’일지라도, 알고 싶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 사이 출판사와 번역가 이동교씨의 도움을 받아 엔지 김과 이메일 인터뷰를 가졌다.

―첫 소설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요.

“처음으로 쓴 소설이어서, 저라는 사람을 소설 속에 많이 집어넣었어요. 이 소설에 영감을 준 제 삶의 주요한 요소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한국인 이민자로서 보낸 제 어린 시절이에요. 한국에서는 친구도 많은 똑똑한 아이였는데, 미국에선 영어를 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상한 옷을 입고 아는 사람도 없는 외국인 중학생이 돼버린 거예요. 그때 저는 말을 잃었어요.”

―소설에선 법정에서 진실이 몇 차례나 그 모습이 바뀌고, 마지막에 다시 뒤집어지는 등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법정 변호사는 저의 첫 번째 직업이었고, 저는 그때 법정에 있는 것이 아주 좋았어요. 그 외 변호사로서의 다른 일은 다 싫어했고, 그래서 20대에 그 일을 그만두었지만요. 제가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서스펜스와 긴장감을 최대화하기 위해 제게 익숙한 재판 과정을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법정이라는 공간이 품고 있는 드라마를 직접 봤으니까요. 가장 확실했던 증인마저도 법정에서 선서를 한 뒤, 마음이 동요하고 본인의 기억을 확신하지 못해요.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생략하는 것과 명백한 거짓말을 하는 것 사이의 선이 흐릿해지죠.”

―딸 메리가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를 놓고 남편 박 유와 아내 영 유가 왜 차이를 보이는 걸까요.

“저는 박과 영 둘 다 부모로서 자식에 대해 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태도를 보였다고 생각해요. 저라면 어떻게 했을지 잘 모르겠네요. 둘 다 딸을 위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궁극적으로 딸에게 ‘최선’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했지만, 서로 관점이 달랐던 거죠. 결국 행복에 대한 심리적 관점이 결합된 도덕적 철학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박은 실용적 공리주의자인 반면, 영은 칸트 같은 의무론자인 거죠.”

그의 한국 이름은 김수연.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열한 살이던 1980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급변한 삶의 행로를 마주해야 했다. 부모가 식료품점에서 숙식하며 일하는 동안, 그는 볼티모어의 이모 집에서 지내며 낯선 나라에서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사이 이름도 바뀌어, 엔지 김이 됐다.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윌리엄스&코널리에서 법정 변호사로 일하기도 했다.

―왜 1980년 미국으로 이민가게 된 건가요.

“한국에서 우리 가족은 가난했어요. 다른 사람 집의 방 한 칸을 빌려서 살았고, 부모님은 우리 가족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길 바랐죠. 헬렌 이모는 존스홉킨스병원 외과 간호사였고, 미국에서 이모네 가족은 잘살고 있었어요. 이모가 미국 시민권을 얻었을 때, 자연스럽게 엄마는 우리 가족도 미국에 가서 비슷한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어요. 특히 저를 위해서, 제 미래를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그때 당시에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제가 부모님께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이고요.”

―서울에 대한 기억이 혹시 남아 있는 게 있는지요.

“정말 많아요! 다들 그렇듯 저도 어릴 때 기억은 조각조각 스치듯 떠오르는데, 아빠한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던 거나, 엄마랑 만원버스를 타고 엄마가 좋아하던 시내 중국집에 짜장면을 먹으러 갔던 기억이 있어요. 길에서 달고나를 만드는 걸 구경하고 모양을 고른 뒤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따라 조금씩 잘라내고, 나중에 부스러기들을 한 번에 모아 입에 털어넣었던 것도 기억나고요. 우리 때는 ‘오징어 게임’처럼 바늘을 쓰진 않았어요!”

―영어를 말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한 상태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6권의 소설을 읽고 또 읽으며 문학을 향한 애정을 키웠다고 소개됐는데요.

“미스터리 전집을 가져갔어요. 열 살 생일 선물로 부모님이 사주신 건데, 양장 표지가 아주 아름다워서 제가 소중히 여기던 책들이었죠. 지금은 그 책을 다 가지고 있진 않지만,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 한 권은 글을 쓸 때 늘 곁에 두었어요.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던 책은 ‘캔디’였어요. 어릴 때는 글을 쓰지 않았지만 책을 정말 많이 읽었는데, 가지고 있는 책이 몇 권 없었기 때문에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은 뒤 연기를 했어요. 보통 머릿속으로 했고,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소리 내서 하기도 했고요. 장면과 장면 사이 서술되지 않은 순간들에, 소설이 끝난 후에, 그리고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상상한 거죠. 그때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에 대한 제 사랑이 시작됐다고 생각해요.”

―작가로서 10년 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요.

“두 번째 소설의 초고를 한참 쓰고 있는 지금,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책을 한 권 이상 쓴 작가가 되고 싶어요!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면, 어떤 카테고리로 분류되기를 거부하는 작가로 성장하고 싶어요. 서로 다른 장르를 뒤섞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계속 반복하면서 판에 박힌 글을 쓰지 않는 작가로요. 저는 새로운 걸 탐구하고 배우는 걸, 새로운 것에 사로잡히는 걸 좋아해요.”

기자가 인터뷰 기사를 작성하는 이 순간에도, 아니면 당신이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노던버지니아 집의 작은 옷방에는 50대 여성의 얼굴을 한 소녀가 앉아서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해리 포터가 지내던 벽장 같은 크기의 아주 작은 방에서. 이야기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한 부분을 재현해 보고, 다른 단어와 구문을 넣어보기도 하며, 문장의 리듬을 확인하기 위해 소리 내서 읽어보고. 천천히, 그러나 지치지 않고 오랫동안. 가끔 글을 쓰다가 막히면, 아마도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선 공기놀이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공기가 머리 위로 힘차게 올라가는 순간, 그의 시선도 함께 부풀어오를 것이다. 상상력도, 꿈도, 그리고 오래된 기억도.

 

엔지 김은… ●1969년 서울에서 출생, 한국 이름은 김수연 ●1980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스탠퍼드대 및 하버드대 로스쿨 졸업 ●로펌 ‘윌리엄스 & 코널리’에서 법정 변호사로 근무 ●매킨지에서 경영 컨설턴트 등 역임 ●2019년 첫 소설 ‘미라클 크리크’ 발표, 20개국 번역 출간, ‘타임’과 ‘워싱턴포스트’ 등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 ●2020년 에드거상, ITW스릴러 어워드, 스트랜드 크리틱스 어워드 등 다수 수상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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