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시민 전쟁 참여… 8년만에 독립
소수 영웅보다 여성·흑인 역할 초점
경제 저항서 ‘신대륙’ 이룩한 미국史
이야기체로 서술 어렵지 않게 읽혀

미국인 이야기 1∼3/ 로버트 미들코프/이종인 옮김/사회평론/각 권 2만4000원
사위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던 1773년 12월 16일 오후 6시가 지날 무렵, 보스턴항의 그리피스 부두에 인디언 복장을 한 50여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홍차를 싣고 하역을 기다리던 다트머스호에 올라타더니 차가 담겨 있는 궤짝을 갑판 위에 올려놓고 깨부수기 시작했다. 곧이어 궤짝에서 쏟아진 차를 선창 너머 바다에 힘껏 내던졌다. 배 주위의 바닷물은 곧 차로 뒤덮였고, 아침이 오기 전에 인근 항구까지 차들이 떠내려갔다.
차를 바다 속으로 내던진 행동을 실제 누가 했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차에 높은 관세가 부과되면서 타격을 입게 된 밀수업자를 비롯한 상인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정부의 아메리카식민지담당장관은 이들을 가리켜 ‘폭도’라고 맹비난했다. 바야흐로 미국 독립전쟁의 불씨가 던져진 것이다. ‘보스턴 차사건(Boston Tea Party)’이었다.
식민지 아메리카 사람들과 대영제국 지배자들은 이미 인지세법과 타운젠드법 등을 계기로 세금 문제를 놓고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어왔다. 아메리카 사람들은 영국 의회에 자신들의 대표가 없는 상황에서 과세하는 건 부당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금을 통해 사실상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건 자유를 빼앗는 행위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반면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보호하려면 군대가 주둔해야 하는데 군대 유지비를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내는 것이 당연할 뿐 아니라, 과세권은 영국 의회와 국왕의 통치권으로서 양보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버텼다. 마지막 타협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보스턴 차사건 이후 영국 정부는 보스턴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보복적인 법률을 제정해 응징했고, 매사추세츠 식민지 역시 다른 아메리카 식민지들과 합세해 대륙회의를 조직하고 영국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년 뒤인 1775년 4월 19일, 보스턴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미국 민병대 간 무력 충돌이 벌어지면서 미국 독립전쟁의 막이 오르게 된다.
옥스퍼드대학에서 미국사 교수를 지낸 미국 역사학자인 저자 로버트 미들코프는 미국 독립과 건국사를 다룬 책 ‘미국인 이야기’에서 세금 문제를 계기로 부각된 아메리카 사람들의 자유를 위한 ‘대의’야말로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분석한다. 원서 제목이 ‘위대한 대의(Glorious Cause)’인 이유다. 12권으로 기획된 옥스퍼드 미국사 시리즈 중 첫 책으로, 3권으로 분권해 번역됐다.
저자는 아메리카 대륙과 4800㎞나 떨어져 있어 신속한 보급과 병력 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 없었던 영국군은 일정한 규모의 군대를 한시적으로 파견해 재빨리 승부를 결정짓는 전격전을 선호한 반면, 아메리카군은 전투 능력은 떨어지지만 13개 식민지 전역에서 무한히 병력을 충원할 수 있기에 정면 대결이 아닌 도망치며 수비하는 장기전을 택한 사실을 주목한다.
특히 영국군은 열악한 여건과 환경 속에서 패배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소극적인 작전으로 임하게 되면서 다 이긴 전투를 놓치는 일이 잦았던 반면, 미국군은 대규모 국민개병제 형태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징집된 시민들의 전투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사유재산권 행사를 통한 자유라는 대의를 강조하고 호응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물론 미국인에게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역량을 의심하는 불안과, 다시 과거로 후퇴하기를 종용하는 내부의 적과도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전쟁은 영국인에게는 대영제국을 지키기 위한 사회 최상층과 직업군인만이 참여한 전쟁이었다면, 미국인들에겐 군인과 시민들이 얽히고 대의를 내세운, 최초의 근대적 전쟁이었다. 8년에 걸친 전쟁은 결국 라이벌 프랑스와 스페인이 아메리카 편을 들면서 영국이 손을 들었고, 미국의 독립으로 끝이 났다.
미국 독립과 건국사를 관통하는 아메리카인들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알렉산더 해밀턴은 ‘연방주의자 논집’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인간은 성찰과 선택을 통해 직접 좋은 정부를 만들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우연과 강압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체제를 누군가에게 부여받아야만 하는 존재인가?”라고.
저자는 역사에서 아메리카인들이 내린 답은 분명했다고 결론짓는다. 즉, 독립과 혁명 기간 그들은 스스로 정치의 질서와 사상을 수립했고, 이후 미국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남았다고. “아메리카인들이 내린 답은 분명했다. 혁명의 기간 동안 그들은 스스로 정치의 질서와 사상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 답안은 이후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로 남았다. 혁명가들이 남긴 지혜에 부응하기 위해 미국인들은 계속해서 그들이 남긴 숙제를 풀어야만 했다.”(3권, 406쪽)
책은 소수의 영웅에 주목하기보다 전쟁을 이끈 주도적 계층이나 흑인노예, 여성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담았고, 역사 지식을 딱딱하게 나열하지 않는 이야기체로 서술해 쉽고도 재미있게 읽힌다.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손에 잡힐 듯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다양한 지도와 도록, 사진, 그림 등은 덤. 천천히 읽다 보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나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같은 느낌이 들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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