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유엔사 “6·25 때 원주 전투, 한국의 게티즈버그”

관련이슈 디지털기획

입력 : 2022-01-25 20:48:41 수정 : 2022-01-25 20:48:4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총검술의 달인’ 프랑스軍 병사들 맹활약
중공군, 치명적 피해 입고 도망치기 ‘급급’

유엔군사령부가 1951년 1월 강원도 원주 전투를 기념하며 SNS에 올린 게시물. 트위터 캡처

“원주 전투가 6·25전쟁 당시 한국을 구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게티즈버그 전투에 비견될 만하다.”

 

지금으로부터 꼭 71년 전인 1951년 1월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중공군과 유엔군 간에 벌어진 원주 전투에 대한 전사(戰史) 연구가들의 평가다. 유엔군사령부도 이같은 인식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하며, 특히 당시 프랑스군의 활약상을 적극 소개해 눈길을 끈다.

 

25일 유엔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6·25전쟁의 게티즈버그’라는 제목 아래 원주 전투를 설명하는 글이 게재돼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남동부에 있는 도시 게티즈버그에선 남북전쟁 도중인 1863년 북군과 남군 간에 전투가 벌어져 치열한 접전 끝에 북군이 승리했다. 남북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투로 꼽힌다. 에이브러햄 링컨 당시 미 대통령이 민주주의 본질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고 정의하는 유명한 연설을 한 곳도 바로 게티즈버그다.

 

전사에 따르면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과 북한군은 유엔군을 상대로 대대적 반격에 돌입했다. 양쪽 다 교통의 요충지 원주의 전략적 중요성에 주목했다. 원주만 점령하면 한반도 중부를 통제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유엔군 입장에선 인해전술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중공군으로부터 어떻게든 원주를 지켜내야 했다.

 

미군을 주력으로 하고 여기에 프랑스군 및 네덜란드군이 참여한 유엔군 부대가 원주 방어에 나섰다. 이들은 1951년 1월 6일부터 20일까지 원주 일대에서 적군의 진격을 막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기온은 무려 영하 34도까지 떨어졌다. 폭설도 내려 눈이 36㎝ 깊이로 쌓인 혹독한 여건이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 금속 재질의 대포 부품이 쩍쩍 갈라졌다. 이를 막기 위해 물을 끓이는 데에만 무려 90분의 시간이 걸렸다.

경기도 수원에 있는 6·25전쟁 당시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 세계일보 자료사진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기 힘든 열악한 조건 아래 뜻밖에도 프랑스 보병들의 총검술이 빛을 발했다. 유엔사는 SNS에서 “당시 ‘아이시클(Icicle)’이란 암호명으로 불린 프랑스군 부대는 총검술에 능숙해 중공군과의 육박전에서 진격을 막아냈고 그로 인해 명성을 떨쳤다”고 밝혔다. 미군을 놀라게 만든 프랑스군의 투혼은 약 1개월 뒤 경기도 양평 일대에서 벌어진 지평리 전투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미 육군 제2사단 제23연대와 그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국군의 2월 대공세를 저지함으로써 유엔군이 서울 재탈환 등 반격으로 돌아설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약 사흘에 걸친 싸움 끝에 유엔군은 300여명, 중공군의 3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만큼 인명피해가 컸다.

 

프랑스는 6·25전쟁 발발 후 한국을 위해 육군 1개 대대와 해군 구축함 1척을 파견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 연인원은 약 3400명에 이른다. 지평리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화살머리 고지 전투 등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경기도 수원에는 6·25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희생을 기리는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