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2006년 11월 ㈜신세계 경영지원실 부회장이 된 이후 정용진 부회장은 회장 승계 질문이 나올 때마다 이렇게 답했다. 자신에 쏟아진 스포트라이트를 무척 부담스러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승’ 역할을 하던 구학서 전 신세계그룹 회장이 물러난 2014년 12월부터 사실상 신세계그룹을 진두지휘 하면서도 ‘겸손 모드’는 계속됐다.
신세계를 2000년대 초 부터 출입했던 기자는 가까이서 정 부회장을 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정 부회장의 중국 출장을 동행 취재하기도 했고, 그의 집무실에서 티 타임도 가졌다. 기자 질문에 꽤 신중하게 답변하는 스타일이어서 눈에 띄는 기사 거리를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말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던 정 부회장이 달라졌다.
소셜미디어(SNS) 시대가 되면서 그의 근황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근엄한 대기업 오너의 모습이 아니라 요리를 하고, 자신을 고릴라 캐릭터로 디스하고, 자녀들과 쇼핑하는 사진 등 격의없는 일상 공유로 많은 네티즌의 호감을 샀다.
인스타그램에서 76만여명의 팔로어를 거느린 슈퍼 인플루언서가 된 것이다. 정 부회장이 올린 조선호텔과 신세계푸드 요리 상품이 품절되는 등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본 사례도 있다.
하지만 신세계 내부에서는 정 부회장의 ‘활발한’ SNS 활동에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적잖았다. ‘대기업 오너=회사’ 이미지가 굳어져있는 한국 상황에서 자칫 그의 SNS 메시지가 회사 경영에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벌어졌다. ‘멸공’ 사건이다. 그야말로 일파만파다.
지난 5일 숙취해소제 사진과 함께 ‘멸공’이라는 해시태그를 달면서 촉발됐다. 인스타그램측이 이를 ‘폭력 선동’으로 분류돼 삭제 처리하자 정 부회장이 “왜 이 글이 폭력 선동이냐”고 항의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인스타그램 글은 복구됐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비롯한 야당 인사들이 멸치와 콩을 구매하는 인증샷을 올리면서 정치 쟁점으로 불똥이 튀었다.
여당 측에서 “색깔론을 퍼뜨린다”며 발끈하자 불매운동 조짐이 일었고, 다른 쪽에서는 스타벅스 ‘돈쭐’을 내자는 움직임으로 맞섰다.
신세계 주가는 11일 전날 대비 3.14% 오르긴했지만 10일에는 6.8% 하락해 시가총액 1600억여원이 날아갔다.
이쯤되자 정 부회장은 ‘멸공’ 관련 발언을 하지 않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신세계 안팎에서 오너 리스크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을 의식한 것이다. 대기업 오너의 SNS는 개인이 아니라 기업의 공적 채널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간 여러차례 대중의 민감한 정서를 건드리는 아슬아슬했던 사례를 감안하면 만시지탄이다.
1968년생인 정 부회장은 올해 55세가 됐다. 유통 ‘빅3’로 불리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과 같은 2세 경영인으로 한 때 ‘부회장 3총사’로 주목 받았다. 정지선 부회장은 2007년 12월, 신동빈 부회장은 2011년 2월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정 부회장만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회장 반열에 오를 일만 남은 정 부회장에게 ‘멸공’ 사건이 약이 됐길 바란다. 정용진 개인의 소통 방식,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기업 오너로서의 공적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자신의 ‘감정’이 기업 브랜드의 이미지, 소비자 신뢰보다 앞설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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