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카예프 대통령, 무경고 조준사격 허용
시위대 등 164명 숨지고 5800여명 체포
충돌 강도 꺾였지만 해결 속단 어려워
WSJ “경제 과실 권력자·기업이 독차지”
단 162명이 富 55% 차지… 양극화 심각
“연료값이 깊숙한 불만 원천에 불 댕겨”

카자흐스탄 정부가 시위대에 ‘경고 없는 조준사격’을 허가하는 등 강경대응에 나서면서 일주일간 이어진 유혈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양상이다. 이번 시위를 계기로 그간 억눌린 자산가와 권력자 부패에 대한 불만, 권력 내부의 갈등이 터져나온 터라 사태가 진정세에 접어들었다고 속단하긴 이르다.
8일(현지시간) 스푸트니크 통신과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며칠 동안 짙은 안개와 폭발음에 뒤덮였던 알마티의 상황이 상당히 진정됐다”며 “길에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한 시민들도 이젠 제법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정부의 강경진압 효과로 보인다.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은 전날 국영 TV로 방영된 대국민 담화에서 시위대를 ‘살인자’라고 부르며 군에 경고 없는 조준사격을 허가했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협상 요구를 일축하며 “범죄자, 살인자들과 어떻게 협상을 한단 말인가. 우리는 국내와 외국에서 온 무장하고 훈련받은 강도들과 마주하고 있다. 그들은 강도이고 테러리스트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트위터에 영어로 “테러리스트와 대화는 없다. 우리는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가 삭제하기도 했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 공수부대를 포함한 옛 소련 안보협의체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평화유지군까지 동원했다.
카자흐스탄 보건 당국은 약 일주일간의 유혈시위로 적어도 164명이 숨지고 5800명이 체포됐다고 밝혔다.
주말을 기점으로 충돌 강도는 꺾였지만 이를 사태 해결로 보기는 어렵다.
처음 시위가 벌어졌을 때만 해도 외신들은 연료비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지난 1일부터 액화석유가스(LPG) 가격 상한제를 폐지해 리터 당 50텡게(약 138원)였던 LPG 가격이 며칠 새 120텡게로 급등하며 주민들이 크게 분노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4일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난 지역의 LPG 가격을 다시 리터당 50텡게로 낮추기로 했지만 이미 전국으로 확산한 시위는 잦아들지 않았다.
이에 연료비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시위의 근본 원인은 극심한 양극화라는 분석이 나왔다. 7일 월스트리트저널은 “카자흐스탄은 석유와 석탄, 귀금속, 우라늄 등 막대한 천연자원 덕분에 중앙아에서 가장 성공한 옛 소련 국가로 여겨졌다”며 “하지만 경제적 과실은 정부와 가까운 기업인이나 권력자가 고스란히 독차지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회계법인 KPMG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전체 부의 55%를 단 162명이 점유하고 있다. 반면 카자흐스탄의 최저임금은 월 100달러(약 12만원)에도 못 미친다. 시위에 나선 알마티의 한 주민은 AFP통신 인터뷰에서 “카자흐스탄은 나자르바예프의 사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1991∼2019년까지 카자흐스탄을 통치한 전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 자리를 그가 지목한 토카예프에게 넘겨준 뒤에도 국가안보회의 의장직을 유지하며 ‘상왕 정치’를 펴왔다.
이번 시위의 배경을 나자르바예프와 토카예프의 갈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자르바예프 밑에서 총리를 역임한 카림 막시모프 국가보안위원회(KGB) 위원장과 나자르바예프의 조카이자 KGB 제1부위원장 사마트 아비쉬가 6∼7일 체포됐다는 보도가 이 같은 분석에 힘을 싣는다. 나자르바예프 측이 토카예프를 몰아내기 위해 이번 시위를 기획했고, 이에 토카예프가 ‘범죄자, 테러리스트’라는 격한 단어를 써가며 강경대응을 주문했다는 것이다. 앞서 나자르바예프도 지난 5일 국가안보회의 의장직에서 내려왔다.
싱크탱크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나이젤굴드 데이비스 선임연구원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놀랄 만한 불안정과 무질서는 이번 시위가 연료 가격 상승에 대한 단순한 불만 그 이상임을 보여준다”며 “연료 가격 급등은 불만의 보다 깊숙한 원천에 불을 댕겼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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