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장 가동을 줄이고 이동도 줄이는 등 인간이 자연을 덜 괴롭히니까 생명체가 돌아오는구나, 이제 나비가 돌아오는 세계가 됐구나. 코로나 팬데믹이 세계를 뒤흔들던 지난해 봄, 매일 한강변을 산책하던 시인 이시영의 얼굴에 기쁨의 표정이 잠깐 스쳐갔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연약하고 작은 나비 한 마리가 눈앞의 풀 사이를 날아가고 있었다.
“강변에 나비가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저것은 세계가 변하는 일이다”(「나비가 돌아왔다」 전문)
나비 한 마리가 돌아오는 일이 어떻게 세계가 변하는 일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세계란 원래 서로 연결돼 있지 않던가. 결국 시는 세계의 변화란 미세한 움직임으로부터 시작하기에 작고 사소한 존재라도 결코 가볍게 보지 마라는 천둥 같은 의미를 담았다.
“인도 뉴델리에서 공장 가동을 일주일 정도 멈췄더니 히말리야 산이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금년에도 코로나의 영향으로 미세먼지가 드문 것 같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자연을 그만 좀 괴롭히라고 인류에 주는 경고 같아요. 작고 사소한 것들, 어떤 미세한 움직임에서 세계의 변화가 시작된다는 인식을 표현한 시죠. 작은 생명의 움직임 속에서 세계의 변화를 읽어야 합니다.”
1969년 등단한 이래 50년 넘게 꾸준히 시업(詩業)에 매진해온 일흔 둘의 시인 이시영이 「나비가 돌아왔다」를 표제시로 4년 만에 신작 시집 『나비가 돌아왔다』(문학과지성사)를 들고 돌아왔다.
1970, 80년대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23년간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편집에 종사했으며, 4년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문단의 가운데에 있었지만, 그가 늘 서 있었던 곳은 본질적으로 시의 자리, 시인의 자리였다. 아래의 대표시 「정님이」를 담은 첫 시집 『만월』을 1976년 펴낸 이래 이번 시집까지 15권의 시집을 꾸준히 펴낸 게 이를 웅변한다.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정님이」 부문)
시인 이시영은 어떻게 반세기 이상 시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시업에만 매진할 수 있었을까. 그에게 시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살이 찌지 않는 늘씬한 체형에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리는 이 시인을, 지난 17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살아온 삶처럼, 말 역시 분명했다.
그의 이번 시집에는 세상과 생활의 파편 속에서 건져 올린, 짧지만 통렬한 세계 인식과 준엄한 메시지를 담은 시편들이 많다. 「수평」은 참새 날갯짓의 의미를 놀랍게 지구적으로 확대한 시편이다.
“참새 한 마리가 내려앉자 가지가 휘청하면서 파르르 떨더니/ 이내 지구의 중심을 바로잡는다”(「수평」 전문)
―시‘수평’은 어떻게 온 것인가.
“지난해 가을쯤 아파트를 산책하고 있는데, 참새가 나무 가지가 앉으니 가지가 휘청했다. 새는 파르르 떨면서 숨을 고르듯이 반듯이 서더라. 반대로 생각하면 지구가 새의 다리를 잡는 것 같은 느낌의 활력이 느껴졌다.”
스스로 가장 애착이 간다는 시 「삼월」도 엇비슷하다, 문득. “저 삼월의 따스한 하늘가에 문득 고개를 묻고 돌아보는 딱새 한 마리”(「삼월」 전문)

―이미지가 선명하면서도 역동성까지 주는, 묘한 감각을 주는데.
“지난해 3월 어느 날, 딱새 한 마리가 하늘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봤다. 딱새와 따스한 하늘이 일치가 되는 느낌이 왔다. 문득이라는 형용사가 중요한데, 문득 고개를 묻고 돌아보는 그 장면이 굉장한 에너지 같은 것을 주더라. 그런 느낌을 표현했다. 비평 용어로 말하면, 감정도 아니고 느낌도 아니고 무드도 아닌 정동(情動·Affect), 감정의 활력 같은 것이 순간적으로 느껴져서 기록한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얻은 깨달음이나 사색도 적지 않게 담겨 있는데, 그게 또 만만치 않다. 수덕사 고승이 들려주는 죽음 이야기는 담담해서 오히려 깊은 여운을 줄지도.
“수덕사의 높은 산방에서 이 절의 방장 설정 스님은 이국에서 온 작가들에게 ‘제 스승은 100세 열반에 드셨는데 그날 아침에도 ‘지금이 몇 시냐’고 물으셔서 ‘8시입니다’했더니 ‘알았다’고 말씀하시고는 잠깐 뜰아래를 내려다보시고는 바로 돌아가셨다’며, 대체 죽음이란 이처럼 문을 열고 나가듯이 조용히 맞이하는 것이라며 그의 곁에 다가선 푸른 눈들을 향해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이었다.”(「문을 열다」 전문)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가 단아하다.
“언젠가 외국 작가들과 함께 고승을 많이 배출한 유서 깊은 절 수덕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니까, 방장이던 설정 스님이 자신의 스승이 열반하던 모습을 들려주더라. 죽음이란 요란하게 맞을 게 아니라며. 요즘은 자연스런 죽음이 불가능하다. 병원에서 기계에 의지하고 연명해서 생을 마감한다. 자연스런 죽음이 사라진 시대에 대한 제 나름의 명상을 기록한 것이다.”
말을 타고 몽골 초원을 달리는 몽골인들이 자신들의 주식인 양 앞에서 보여주는 생명 존중의 마음도 예민하게 포착했다. 양을 죽일 때조차 연민의 마음을 잃지 않는 그들의.
“어린 양들이 주인의 품에 안기는 순간, 자신의 목숨이 다했음을 알고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주인은 숨겼던 마치를 꺼내 단숨에 가격하여 그 눈을 조용히 감겨준다”(「테렐지 숲에서」 전문)
―고통 없이 양을 보내려는 몽골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인데.
“2004, 5년쯤 문단 차원에서 몽골과 교류행사를 위해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3, 4킬로미터 떨어진 국립공원 테렐지(Terelj) 숲을 간 적이 있었다. 양을 주식으로 하는 몽골인들은 오른쪽 옆구리에 망치나 칼 등을 차고 다니며 양을 잡는다. 양들도 나 잡으러 왔구나, 하고 알고, 뒤로 주춤 주춤 밀려난다. 몽골인들은 고통을 덜 주기 위해 양을 잡자마자 곧장 머리 정수리를 가격해 잡는다. 양을 주식으로 삼지만 생명에 대한 존중이 있구나 하는 걸 느꼈다.”
시인의 어릴 적 이야기나 가족, 지인들의 이야기 역시 예리하게 담겨 있다. 시 「한밤중」에서 배를 곯는 아기 쥐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드러내는 어머니의 모습은 몽골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쥐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결국 우주의 모든 존재는 둘이 아니라는.
“한밤중 살강 위에 엎어놓은 사기그릇이 쨍그랑 하고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 이놈들 거기 그대로 있거라!’ 어머니가 부엌에 달린 안방 문을 와락 열고 나서자 희미한 불빛 속에서 아기 쥐 세 마리가 까만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다. ‘허긴 너희들도 먹고 살아야지, 그런데 에미는 어디 갔다냐?’ 부엌문이 다시 꽝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한밤중」 전문)
그가 오랫동안 문단의 언저리에서 활동해온 덕분에 알 수 있는 작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는 에피소드를 읽는 재미도 솔솔하다. “성심여고 후문에서 산천동 깔그막 용산성당 올라가는 길…낯선 청노루힐빌라”(「목월 선생」 부문)에서 떠올린 대학 스승 박목월의 모습부터, 현재 지가를 올리고 있는 소설가 김훈의 2005년 남북작가대회 때의 일까지.
“…그런데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김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남대현을 향해 ‘정릉천 쪽에 있던 돈암탕 알아요?’ 하고 물으니 남대현이 ‘그 동네에서 제일 높던 빨간 굴뚝?’ 하며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둘은 그날 밤 삼지연 매점 안 들쭉술을 다 마셔버려 남의 술꾼 이문재를 무척이나 섭섭하게 했을 뿐더러, 다음 날 새벽 아무런 준비 없이 반팔에 반바지 차임으로 천지에 오른 김훈은 자동차 시트로 온몸을 감싸고 매서운 추위에 오돌오돌 떨어야 했다.”(「돈암탕」 부문)

―이번 시집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시라는 것이, 소통불능이면서 주체하지 못한 자기감정을 낯설게 드러내는 게 아니라, 소리 소문 없이 조용한 자기반성이나 자기 울림, 조용한 서정을 전해주는 양식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몇 해 전 수술을 받는 등 어려운 시절을 넘어온 그는,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의 시들은 내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쓰여진 것들이다. 몸과 마음이 기진했을 때 시를 떠올리곤 했다”고 말했다.
“…누가 갑자기 숭렬이 형에게 의붓자식이란 말을 했다…상대를 코피 나게 쓰러뜨린 숭렬이 형이 이번엔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진식이 형이 달래고 얻어맞은 친구가 다가가 잘못했다고 빌어도 울음은 저녁때가 다되도록 그치지 않았다…1950년대 지리산 밑 마을에는 의부를 둔 소년들이 많았다.”(「중학시대」 부문)
시 「중학시대」가 그린 풍경처럼, 많은 남성들이 입산하고, 이들이 돌아오지 못하면서 많은 여성들이 개가를 하고, 많은 아이들 역시 의붓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곳. 1948년 여순 사건 직후 산으로 올라간 ‘구빨치산’과 한국전쟁 전후 산으로 올라간 ‘신빨치산’이 맹위를 떨쳤던 지리산 아래, 구례는 시인 이시영의 탯자리이자 문학적 원형질이었다.
“어렸을 적 지리산 백운산 일대에선 구빨치와 신빨치가 뒤섞여서 밤이면 노골적으로 마을을 접수하곤 했지요.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1956년에도 빨치산이 있었어요.”
1949년 구례에서 태어난 이시영은 대학 2학년 때이던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잡지 『월간문학』의 제3회 신인작품 공모에 시가 각각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어떻게 문학의 숲, 시인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
“구례에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있고, 문인들도 많이 모여 산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는데, 출세할 생각보다는 글 짓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책을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살다보니 감성이 저절로 움직인 것 같다. 기적 소리를 들으면 어디 가고 싶고, 종소리를 들으면 예사롭지가 않았다. 마음속 서정의 울림이 있어서 문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조지훈과 박목월, 박두진 등이 선하고 평해주던 청소년잡지 『학원』의 영향이 컸다. 고등학교 때 『학원』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황동규나 이제하, 정호승 등이 모두 학원 출신이었다. 일찍이 진로를 정한 셈이다.”
등단 이후, 그는 시집으로 『만월』(창비, 1976), 『바람 속으로』(창비, 1986), 『길은 멀다 친구여』(실천문학사, 1988), 『이슬 맺힌 노래』(들꽃세상, 1991), 『무늬』(문학과지성사, 1994), 『사이』(창비, 1996), 『조용한 푸른 하늘』(솔출판사, 1997; 책만드는집, 2015, 재출간), 『은빛 호각』(창비, 2003), 『바다 호수』(문학동네, 2004), 『아르갈의 향기』(큰나, 2005),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창비, 2007),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 2012), 『호야네 말』(창비, 2014), 『하동』(창비, 2017) 등을, 시선집으로 『긴 노래, 짧은 시』(창비, 2009) 등을 펴냈다. 그 사이, 만해문학상과 백석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지훈문학상, 박재삼문학상, 임화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시 세계를 설명해 달라.
“크게 보면 역사가 담긴 증언시를 비롯한 서사시의 세계와 짧은 서정시의 세계 사이를 왔다갔다 하거나 교차하면서 시 세계를 펼쳐온 것 같다. 시기적으로 구분해 본다면, 초기부터 민주화가 되기 전까지는 참여시를 더 많이 썼고, 민주화 이후 네 번째 시집 『이슬 맺힌 노래』부터는 서정시를 더 많이 쓴 것 같다. 예를 들면, 첫 시집 『만월』은 농촌 정서와 지리산 일대의 반란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지리산 일대의 쓰러져간 영혼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특히 첫 시집 『만월』에 실린 시 「정님이」는 그의 초기를 대표하는 시이자,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애송하는 그의 대표시이기도 하다.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정님이」 부문)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애송하는 「정님이」는 누구인가.
“나보다 서너 살 위인 정님이 누나는 6·25전쟁 당시 지리산간 마을을 불태운 동계작전 직후에 갈 데가 없어서 우리 집에서 부엌일을 봐주고 아이들을 키워준 젊은 식모였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정이 많아서 혈육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누나는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직장에 다니다가 용산 홍등가에서 일하게 됐다. 1960년대 용산 홍등가에서 봤는데,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1960, 70년대 박정희 시대에는 시골에서 식모로 일한 여성들이 서울로 올라가서 여공이 됐다가 다시 홍등가로 떨어진 경우가 많았는데, 시 속에는 바로 그런 산업화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서정과 서사의 세계 사이를 왕래하거나 교차한 그의 시 세계. 서정과 서사가 절묘하게 교차된 시 「물결 앞에서」는 과연 서정시인가, 참여시인가.
“울지 마라/ 오늘은 오늘의 물결이 다가와 출렁인다./ 갈매기떼 사납게 난다./ 그리고 지금 지상의 한 곳에선/ 누군가의 발짝 소리가 사납게 움직인다.// 울지 마라/ 내일은 내일의 물결이 더 거세질 것이다./ 갈매기떼 더욱 미칠 것이다./ 그리고 끓어 넘치면서/ 세계는 조금씩 새로워질 것이다.”(「물결 앞에서」 전문)
―김명인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아름답고 슬프다”고 하더라.
“민주화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수 없이 많은 부침을 겪으며 진행돼 왔다.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고 때로는 승리의 작은 시기도 있었다. 절망의 시기를 더 많이 겪었다. 참여적인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1974년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문인 선언에 참여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가 여러 차례 연행됐다. 1980년부터 23년간 창작과비평사에서 편집장, 주간, 부사장 등으로 일했고, 김지하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출간했다가 안기부에 연행돼 혹독한 조사를 받기도 했다. 특히 창작과비평사 주간 시절인 1989년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를 게재했다가 옥고를 치러야 했다. 2006년부터 단국대 문창과 초빙교수로 교편을 잡고 있다.
―1970, 80년대 민주화 운동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 1980년부터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일하게 되는데.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이었다. 1971년 잡지 『창작과비평』에 첫 작품을 발표했는데, 창작과비평사를 이끌던 염무웅 선생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다. 현재의 ‘한국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멤버가 되면서 각종 집회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창비 사장이던 염 선생이 해직됐다가 1980년 영남대로 복직하면서 문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때부터 창비에서 일하게 됐다. (창비 시절은 어땠는지?) 창비는 싸움터이자 생계를 책임진 일터였다. 시청에 정부 검열단이 있었는데, 대장지를 들고 검열을 받으러 다니곤 했다. 편집후기도 검열을 했는데, 빨간 글씨로 삭제나 전체 삭제를 당하기도 했다. 대장지까지 줬는데, 폐간됐다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1980년대, 전두환 시절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창비는 이 사이 폐간되고 출판사 등록도 취소되기도 했다. 저항의 시대에 살았다. 매일 싸우고 문인들과 울분을 토하던 그 시절, 베스트셀러도 많이 냈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나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이 큰 인기를 끌었고, 이은성의 소설 『소설 동의보감』은 수백만부가 팔렸다. 베스트셀러를 내면서 창비의 기틀을 다졌다. 1990년대 후반부터 힘을 펴기 시작했다.”
―『창비』 1989년 겨울호에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를 게재했다가 구속됐다.
“『신동아』가 황석영의 방북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게재하려다가 당시 시대 상황이 엄혹해 싣지 못했고, 『다리』의 임헌영씨가 원고를 달라고 해서 황석영의 부인이 마포에서 내렸다. 그녀는 혹시 볼 생각 없느냐고 나에게 물었고, 가져와 보라고 해서 백낙청 편집인의 동의 없이 실어버렸다. 열흘도 되지 못하고 연행돼 구속됐다.”
―지금까지 15권의 시집을 펴냈는데, 시 창작의 원동력이나 방법, 비결은 무엇인가.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 아울러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특히 순수해야지, 사리사욕에 차서는 안된다. 국회의원이 되려거나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그것은 곧 삿됨이다. 공자가 사무사(思毋邪)라고 했는데, 생각함에 삿됨이 없어야 한다. 삿됨이 없는 순수한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되, 삿됨이 없어야 한다. 아울러 경청할 줄 알아야 하고, 스스로 반성도 해야 한다. 스님만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범상한 사람도 자기 마음을 가다듬을 줄 아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앞으로 어떤 시인,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저는 베스트셀러 시인이 된 적도 없고, 요란하게 하지도 않았다. 열정을 간직하되, 삿됨이 없이 순수한 서정시를 쓰며 50년간 시업에만 몰두했다. 조용히 시업에만 매진했다는 말이 좋다. 조용히 시업에 매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렇게 될 것 같은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까. 요란하게 나대는 사람도 아니고, 조용히 마포에서 엎드려서 시나 쓰는 사람이니까.”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해설’에서 “병들고 아픈 역사적 내상과 시인 자신의 상처를 말없이 함께 포개어가면서 반세기 넘도록 조용히 시업에 매진”(118쪽)했다고 평했고, 문학평론가 구혜숙 역시 “참여와 저항이라는 정치 문학 운동의 최전선에 늘 서 있으면서 저항과 변혁의 정신을 섬세한 언어와 서정성을 바탕으로 미학적으로 형상”했다고 분석했다.
―4년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문단 중심에도 서 있었는데.
“문단은 이제 없다. 우리는 지금 문단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문단의 병폐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문구 시절의 문단은 그립다. 그때는 고통스럽지만, 순수했고 정이 있었으니까. 그리운 시절의 청진동 문단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 오지 못하겠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와서 자리에 앉자마자/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의자」 전문) 순수했던 시절 및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기다림이나 환대를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경고를 담은 시 「의자」를 설명할 때에도, 그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서강대교 밑에 의자가 있는데, 마치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다. 의자가 허리를 펴고 앉아 있으면, 의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앉아 있다. 어떤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우중충한 자리에도 어떤 한 사람이 앉으면 환해지는 순간, 전체 분위기를 혁신시키는 순간이 있다. 도시에선 사무적인 만남이 많지만, 한 사람이 들어와서 자리 전체를 환하게 밝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가령 황석영이 우중충한 자리에 와서 웃기면 자리가 환하게 빛난다. 이문구씨나 송기원씨도 그렇다. 일종의 환대나 반가움을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경고다.”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기 자신에 충실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젊은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는데, 가성, 꾸민 소리가 많은 것 같다. 진정성 있는 시가 드문 것 같다. 좋은 시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한편의 시 속에 자기 자신의 체험과 사랑과 온갖 문화가 녹아드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젊은 시인들에게 각별한 애정의 고언을 하는 이유는, 시란 묘사만도 아니고 감정의 분출만도 아닌, 느낌의 분출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순간의 느낌을 영원으로 낚아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시라는.
“시라는 것은 묘사도 아니고, 감정의 분출도 아닌, 말하자면 느낌의 분출이다. 시라는 것이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느낌을 낚아채 기록하는 것이다. 시란 소설처럼 억지로 앉아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문득 와야 한다.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는 그림에 불우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많이 담았지만, 세잔(Paul Cezanne)은 사과를 그리면서 사과를 자신으로부터 밀어버리고, 즉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고, 사과 그 자체로 살아내게 했다. 세잔이 표현한 사과는 살아있는 사과, 진정한 애플니스(Appleness)였다.”
그리하여, 진정한 시인이란 만상의 소리를 깊이 있게 들어야 하고, 또 들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놀라서 달음박질치는 다람쥐의 제재바른 발자국 소리도, 때론 벼락처럼 첨탑 높은 교회당을 때리는 야훼의 노한 음성도 들을 줄 아는.
“좋은 시인이란 어쩌면 듣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깊은 산 삭풍에 가지 부러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놀라서 달음박질치는 다람쥐의 제재바른 발자국 소리도 조심조심 들을 수 있다/ 때론 벼락처럼 첨탑 높은 교회당을 때리는 야훼의 노한 음성도/ 어릴 적 볏짚 담 너머 키 작은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좋은 시인이란 그러므로 귀가 쫑긋 솟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잉크병 얼어붙은 겨울밤 곱은 손 불며/ 이 모든 소리를 백지 위에 철필로 꾹꾹 눌러쓸 것이다”(「듣는 사람」 전문)
시인 이시영은 오늘도 귀를 쫑긋 세우고 예민하게 듣고 있을지 모른다. 세상과 삶의 순간에서, 현장에서 영원한 그 무엇을 포착하기 위해. 마포나루에서, 용산포구에서, 한강변에서, 지리산 자락에서, 백두산 천지에서, 몽골 평원에서…그리하여 창백한 푸른 점에서 고독하게. 나의 마음에서도, 당신의 심장에서도.(20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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