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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잡기 몰두 정치인들… 끼니 걱정하는 국민들

입력 : 2021-11-23 01:00:00 수정 : 2021-11-22 20:01:42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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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군정 중위 눈에 비친 한반도 해방정국

해방직후 미군정 통치… 혼란 여전
1년 동안 물가 100배 넘게 인플레
정치인들 은행 저축하며 재산 불려

피살 여운형에 조사 바치며 애통
이승만 돈에 대한 탐욕 그려 ‘대조’
‘李, 가짜뉴스로 여론조작’ 기술도
신당동에 있는 집에서 가족들과 식사하고 있는 레너드 버치 중위(가운데)와 서서 서빙하고 있는 한국인 도우미들. 그들은 부부로 이부입과 그의 부인이라고 돼 있다.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역사비평사 제공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정치는 국민들의 정서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데만 몰두했다.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

미군정 중위 눈에 비친 1945∼48년 한반도를 다룬 책 ‘버치 문서와 해방 정국’의 저자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이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던 한국인들의 바람은 현실과 전혀 달랐다. 정치는 혼란했고, 사회적 안전은 전혀 담보되지 않았으며, 생활필수품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버치 문서는 1945년 12월15일 한국에 배치되어 주로 한국의 정치인들을 담당하는 미군정 정치고문단 소속 레너드 버치 중위가 작성한 보고서다. 그는 1948년 5월 총선거 직후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현장에서 당대의 저명 인사들과 교류하며 보통의 한국인보다 더 한반도의 앞날을 염려하며 정치적 중재자로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버치 문서는 기록과 조사, 분석, 보고의 문서부터 명함, 편지, 사진, 메모 등 다양한 자료로 남아 있다.

◆미군정 아래 사리사욕 챙기던 정치인들

해방 직후 들어선 국가는 한국인의 국가가 아닌 미군정이었다. 남한에 군사정부를 수립한 미국은 극도로 피폐한 땅을 마주했다. 사회 혼란 속에서 통치를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돈을 계속 찍어낼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물가가 1년 동안 100배 넘게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계속됐다. 미군정이 1947년 지방을 조사하면서 일반인에게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여론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은 답변은 “가족을 위해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였다.

누구도 미군정이 3년이나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다. 버치 문서에 따르면 당시 은행 이자는 매월 10%였다. 1년이면 100%가 넘는 이자율이었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은행에 저축한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정치자금의 일부를 은행에 예치해 높은 이자를 즐겼다. 1946년 7월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2000만엔’이라는 제목의 버치 문서에는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 원금 125만엔에 대한 이자로 매달 그 10%인 12만5000엔을 받고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8선 이북에 살던 한국인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련군은 군사정부를 수립하진 않았으나 한국인들로 하여금 5도 행정국이라는 조직을 만들게 하고 이를 조정, 감독했다.

◆여운형과 이승만에 대한 상반된 평가

미군정이 적극적으로 정치공작을 펼쳤던 여운형과 이승만에 대한 평가도 버치 문서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해당 문서에서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1947년 7월19일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에서 여운형이 피살되자 버치는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조선 사람들은 울고 있지만, 여운형 선생의 정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돌아가신 사람이 아닙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인물입니다”라고 애통해했다. 버치는 여운형에게 한국어 발음을 영어로 표기한 조사(弔辭)를 바치며 존경심을 표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 교수는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 진정한 정치를 하려고 했던 인물”이라며 “정치를 하라고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정치는 하지 않고 공작만 하는 한국 현대사의 대통령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미군정을 방문한 볼티모어 선 마크 왓슨 기자(왼쪽 두 번째)와 함께 사진을 찍은 레너드 버치 중위(오른쪽). 사진 뒤에 맨 왼쪽의 여인은 군정 요원이고, 버치 옆에 있는 한국인은 “헌신적이고 겸손하며 믿을 만한 박기춘씨”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역사비평사 제공

하지만 이승만에 대한 버치 중위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1947년 3월5일 ‘이승만’이라는 제목의 버치 문서에는 “이승만이 한국의 대통령직을 받아들였다. …(중략)… 그가 이러한 역할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김구와 이승만을 비교한 글에서는 “돈에 대한 이승만의 욕심은 권력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반면에 김구는 집단의 수장으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을 추구한다”고 비판했다.

이승만 관련 버치 문건에는 그가 ‘가짜 뉴스’를 통해 여론 공세를 펼쳤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1947년 4월19일 ‘이승만의 외교적 성공’이라는 제목의 버치 문서에 따르면 이승만은 워싱턴 방문을 통해서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얻어냈으며, 모스크바 삼상 협정의 틀은 유지하되 남한에서만 임시조선정부가 먼저 수립되는 것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바뀌었다고 선전했다. 또 남한만의 임시조선정부가 들어서면 그 수장은 이승만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퍼트렸다. 이승만의 이런 식의 ‘가짜뉴스’ 활동은 오래전부터 지속해 왔던 것으로 나와 있다.

박 교수는 책에서 “버치 문서는 미군정기의 실패와 함께 한국 사회가 겪었던 좌절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해방과 통일 독립국가 수립이라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를 상실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기회의 상실은 곧 전쟁이라는 위기로 다가왔으며, 또다시 그런 경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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