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고생한 나에게 선물’… 자기 위안 효과

이탈리아 소도시 골목길을 걷다가 옷가게 쇼윈도 유리벽에 적힌 ‘Shopping is cheaper than a psychiatrist’라는 글귀를 본 적 있다. 나도 모르게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 십 년도 지난 일이라 골목 풍경은 기억나지 않지만 ‘쇼핑이 정신과 의사보다 싸다!’라는 이 문장은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다. 대중 강연을 할 때 청중이 지루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나는 그들을 웃겨볼 심산으로 그때 찍어둔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이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 상담받으면 시간당 몇 십만씩 내야 하는데 그렇게 큰돈을 지불해도 인생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그 비용을 내고 상담할 수도 없으니까 차라리 그 돈으로 핸드백이라도 사두면 항상 곁에 두고 흐뭇해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고 쇼핑이 상담을 대신할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은 쇼핑을 치유 목적으로 널리 활용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마거릿 멜로이 교수 연구팀은 쇼핑몰에 들어가는 성인을 대상으로 무엇을 살 것인지 사전에 묻고 나중에 쇼핑몰에서 나올 때 그들이 실제로 구매한 것이 계획했던 품목과 일치했는지를 비교했다. 동시에 그들의 기분 상태와 자기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구입한 품목이 있는지도 함께 조사했다. 연구 대상자 158명 중 56%가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산 물건이 있다”고 응답했다. 치유 쇼핑을 한 사람들 중 63%는 계획에 없었던 품목을 샀던 것으로 나타났다. 충동구매를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기분 상태가 더 우울했다.
정신과 의사인 나도 그리 다르지 않다. 하루 종일 내담자가 쏟아내는 우울과 분노를 담아내느라 녹초가 된 날 밤에는 책상에 앉아 매력적인 디자인의 볼펜이나 고상해 보이는 안경테를 찾아 인터넷 쇼핑 사이트를 뒤지곤 한다. 실제로 구매하지는 않더라도 사고 싶은 물건을 눈으로 보는 동안만큼은 지친 마음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아주 가끔은 일하느라 고생한 나를 위해 특별한 걸 선물해주고 싶어서 평소 눈여겨봐둔 아이템을 살 때도 있다. 과하면 곤란하겠지만 ‘이 정도의 선물을 받아도 될 만큼 열심히 살았잖아’라며 스스로를 치켜세워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 쇼핑에 치유 효과가 있다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위의 연구팀은 69명의 대학생에게 쇼핑 전의 상태와 쇼핑하고 나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자신의 소비 행동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기록하도록 했다. 그 내용을 분석한 결과 연구 참여자의 82%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쇼핑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고 긍정적인 경험으로 인식했다.
쇼핑 욕구가 늘어났다면 그건 현실에서 자기 뜻대로 이뤄지는 게 없다고 느끼는 좌절감 때문일 수도 있다. 돈으로 뭔가를 사는 동안만큼은 순간적으로 세상을 자기 손아귀에서 통제한 것처럼 느낄 수 있으니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만족을 쇼핑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몇 억원 아니 몇 십억원짜리 집은 도저히 살 수 없으니 그나마 명품백이라도 사두려는 마음이라고 할까. 다만 쇼핑 테라피에서 주의할 점은 수시로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쇼핑하고 나서도 계속 더 우울해진다면 마음 진찰을 받는 게 좋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