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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맞서 ‘희망의 슛’… 축구로 나라 잃은 설움 날리다

입력 : 2021-10-25 18:53:48 수정 : 2021-10-25 18: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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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로 만나는 ‘축구영웅’ 채금석

日 탄압 불구 조선 대표 키커 활약
빠른 스피드… ‘군산 오토바이’ 별명
1935년 조선축구단 일왕배 제패
민족정신 고취·韓 축구 발전 헌신

고인 뜻 기려 지역 후진양성 계속
11월 30일까지 사진·유물 등 전시
전북 군산시 군산근대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오토바이 채금석’ 전시회장 입구에 걸린 그의 모습과 약력.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제공, 조성민 기자

“축구공은 나의 인생 전부이며 다시 태어나도 공과 함께 살겠습니다.”(채금석)

축구를 사랑하던 군산 소년이 있었다. 그는 빠른 스피드와 돌파력을 자랑한 공격수로 당시 가장 빠른 운송수단이던 ‘오토바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축구공과 함께 달린 채금석(1904∼1995) 선생은 축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일에 앞장섰고, 후진양성에 힘쓰며 한국축구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전북 군산시 군산근대역사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오토바이 채금석’ 전시회를 19일 찾았다. 지난 6월 시작한 이번 전시는 다음달 30일까지 계속된다.

◆축구로 항일운동… 일제강점기 열린 경기서 일본 격파

축구는 1882년(고종19) 6월 인천 제물포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Flying Fish)호 선원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선원들이 부둣가에서 차던 공을 아이들이 주워 흉내 낸 것이 시초다. 이후 축구는 1895년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반포에 따라 체육이 학과목으로 인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된다. 특별한 장비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었기에 축구는 금세 인기를 끌었다. 또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키울 수 있어 일제에 대항하는 항쟁의 수단이자 민족운동의 원천이 됐다.

일제는 대규모 군중이 모이는 것을 경계해 1907년 보안법을 공포하여 축구대회 등을 제약했고 1910년 8월29일 국권을 강제로 빼앗으며 모든 주권과 행동의 자유마저 박탈했다. 그러나 전국적인 축구의 열기는 더욱 높아져 1910년대를 전후로 각 학교와 도시마다 축구팀이 만들어졌다. 1921년 조선체육회를 주최로 전국 규모의 ‘전조선축구대회’가 개최되는 등 전국서 크고 작은 축구대회가 줄을 이었다.

우리나라 축구는 일제강점기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해 1927년 연희전문이 일본 와세다대학팀을 4대 0으로 제압하고, 1928년 숭실중학교가 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 1935년 조선축구단이 일본 명치신궁 경기대회와 전일본 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일본을 격파했다.

이런 가운데 서울 경신중에서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던 채금석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일제의 탄압에 맞서다 퇴학당한다. 학생 신분을 벗어난 그는 각종 국내외 대회에서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활약했다. 경성축구단 소속 공격수로 경성·평양 축구대항전 등에 참가해 승리를 거뒀다. 1934년에는 조선 대표선수로 일본과 중국 원정 경기에서 대승을 거뒀다. 1935년 베를린 올림픽 선발전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

축구가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되던 시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사용되던 짚으로 만든 축구공.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제공, 조성민 기자

◆축구의 도시 군산

특히 군산의 축구 열풍은 남달랐다. 1903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영명학교에서 시작된 군산 축구는 1911년 군산영명축구단이 창단하면서 본격화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정한 규칙은 물론 유니폼도 없이 바지 저고리에 짚신을 신고 경기를 했다.

축구에 대한 열기는 1920년 5월 군산체육의 시초인 평화축구단 창단으로 더욱 확산됐다. 평화축구단은 창단 이듬해 청년팀과 소년팀으로 구성하고 전국 규모의 남조선 소년 축구대회를 개최했다. 1930년 7월 평화축구단을 모체로 군산체육회가 창립되고, 1932년 일출정에 종합운동장인 구 공설운동장이 만들어졌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1942년 구기종목을 전면 금지하면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축구를 비롯한 군산의 체육활동은 위축됐다. 그러나 광복 이후 1947년 제1회 전국 축구대회를 군산체육회 주최로 개최하는 등 축구 도시 군산의 면모는 계속됐다.

일제강점기 군산 출신 축구선수 채금석이 이끌던 평화축구단. 뒷줄 왼쪽 두 번째가 채금석이며 경성축구단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제공, 조성민 기자

채금석도 1934년 베를린 올림픽 예선전을 끝으로 국가대표선수 생활을 마치고 고향 군산으로 돌아온다. 그는 군산 축구팀을 이끌며 54세까지 선수로 활동했다. 또 매일 아침 운동장을 찾아 축구 동호인과 초중고생들을 지도하며 군산 지역 축구발전에 앞장섰다.

채금석의 축구 정신을 잇기 위해 지역인사와 제자들은 1992년 초·중·고교가 참가하는 ‘금석배 전국 학생 축구대회’를 창설해 지금까지 매년 축구 꿈나무들을 육성하고 있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은 “한국 축구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채금석의 삶과 근대 축구의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당시 생생한 현장 사진과 유물을 그의 고향인 군산에서 전시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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