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30주년 맞아 ‘아니타 힐 폭로’ 재조명

올해는 미국 역사상 두번째 흑인 연방대법관인 클라렌스 토머스(73) 대법관이 취임한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동시에 토머스 대법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그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는 아니타 힐(65) 현 브랜다이스 대학교 교수의 폭로가 나와 미국 사회를 뒤흔든지 꼭 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극단적 보수 성향의 토머스 대법관이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낙태 사건 등에서 뜻밖의 지도력을 발휘해 대법원의 새로운 ‘실세’로 부상할 전망이란 관측이 제기돼 눈길을 끈다.
◆“우리는 토머스 대법관의 세계에 살고 있다”
1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지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보수 대 진보가 6대3으로 재편되며 ‘보수 우위’ 구도가 굳어진 미 대법원이 이제 낙태 사건 판결을 앞두고 있다. 텍사스 등 보수 세력이 지배하는 주(州)에서 성폭행에 의한 임신의 경우도 일정한 기간이 경과하면 낙태를 못하게 막고 처벌하는 ‘초강경’ 낙태금지법을 제정한 것이 계기가 됐다.
미 대법원은 1973년 일명 ‘로 대 웨이드’ 사건에서 여성의 낙태를 허용하는 판결을 했다. 이후 이 판례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긴 하나 보수 진영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며 판례 변경을 요구해왔다. 마침 보수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 대법원에서 ‘로 대 웨이드’ 판례가 깨지고 낙태가 사실상 금지될 것이란 기대감이 보수 진영에서 커지는 가운데 그 중심에 극단적 보수 성향의 토머스 대법관이 있다는 게 가디언의 전망이다.
1991년 10월부터 거의 30년간 재임해 온 토머스 대법관은 마침 존 로버츠 대법원장에 이은 미 대법원의 ‘서열 2위’이기도 하다. 사우스텍사스 로스쿨의 조시 블랙맨 교수는 가디언에 “미 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리는 사람은 이제 가장 보수적인 구성원 클라렌스 토마스”라며 “우리는 토마스 대법관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시사주간지 ‘네이션’의 엘리 미스탈 법조전문기자도 가디언에 “미국의 보수주의 운동가들은 수십년 동안 토머스를 보수주의 사법운동의 중심에 두려고 노력해왔다”며 “앞으로 대법원이 낙태 사건 등을 심리하는 과정에서 토머스가 다수의견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견해를 전달했다.

◆취임 30주년 맞아 ‘아니타 힐 폭로’ 재조명
토머스 대법관은 지난 30년간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하며 다른 대법관들을 이끌려는 의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그가 임명 과정에서 입은 크나큰 상처 때문이란 게 정설로 통한다. 1991년 당시 공화당 조지 부시 대통령에 의해 새 대법관 후보로 지명된 토머스 판사는 청문회를 앞두고 오늘날의 ‘미투’를 연상시키는 상황에 직면한다. 한때 그의 부하직원이었던 아니타 힐이란 여성이 “토머스가 내게 성관계를 강요했으며 수시로 성희롱을 저질렀다”고 폭로한 것이다.
상원 법사위 청문회 과정에서 토머스와 힐 간에 거친 공방이 오갔고 토머스는 거의 낙마 직전에 이르렀다. 하지만 상원 법사위는 대체로 토머스를 두둔하고 ‘힐의 폭로엔 신빙성이 없다’는 투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결국 상원 본회의는 표결 끝에 찬성 52표 대 반대 48표로 토머스 대법관 인준안을 가결했다.
당시 상원 법사위원장이 바로 지금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다.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이던 바이든은 ‘흑인 대법관’의 탄생 필요성에 공감하고 또 혹시 있을지 모를 흑인들의 반발을 의식해 토머스 편을 들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든은 2020년 대선에 도전할 의사를 밝힌 직후인 2019년 4월 현재 브랜다이스대 교수로 재직 중인 힐한테 전화를 해 “1991년 당시 청문회가 편파적으로 흘러가도록 방조하고 토마스 후보자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했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힐은 그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진정성 있는 사과로 볼 수 없다”고 깎아내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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