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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바둑·인간존중’ 품은 조선 최고의 戰時 재상

입력 : 2021-10-11 19:34:15 수정 : 2021-10-11 22: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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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인간 서애 류성룡‘

임진왜란 7년동안 총사령관 역할
외교전부터 국방체계까지 도맡아

명 장군 이여송·선조 바둑 대국서
집하나까지 계산해 무승부 이뤄

충효·실용 기둥 위 개혁 지붕 올려
백성 위하는 현실 정치 펼치려 애써
서애 류성룡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

서애(西厓) 류성룡은 조선 500년 역사 속 가장 큰 위기였던 임진왜란 당시 군사와 행정을 총괄한 전시 재상이었다. 보통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을 첫 번째 영웅으로 꼽지만,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류성룡이 없었다면 조선은 국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류성룡은 온갖 비난에도 종6품 정읍 현감 이순신을 6단계 뛰어넘은 정3품 전라 좌수사로 발탁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류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한 한 건이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라고 평가했다.

◆이순신에게 ‘병법서’ 보낸 총사령관

류성룡은 탁상머리에 앉아 있던 관리가 아니었다. 문관이자 정치인이었지만, 그는 임진왜란 7년 동안 전국 각지를 누비며 조선의 총사령관 역할을 했다. 외교전 등 전시국가 운영의 밑그림을 그리고 군사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전략·전술을 직접 짰다.

최근 출간한 책 ‘인간 서애 류성룡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일본에 맞선 전체적 전쟁 계획으로 육지는 권율, 바다는 이순신에게 맡겼다.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순신에게 류성룡은 효과적인 전투방법을 담은 ‘증손 전수방략’이란 병법서를 지어 보냈다. 이를 받아본 이순신은 “해전과 육지전의 차이점, 그리고 화공법 등을 낱낱이 말했는데 참으로 만고에 특이한 뛰어난 전술이었다”고 감탄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병력, 군량, 무기 모든 것이 부족해 도저히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류성룡은 군졸을 늘리기 위해 양반도 징집했고, 속오군제를 시행해 사노비인 천민도 군졸로 동원했다. 군량미를 보충하기 위해 둔전제를 활성화하고 공명첩을 발행했으며 모속제, 작미법 등을 시행했다. 국방체제도 국지전 중심이던 제승방략을 전면전에 대비할 수 있는 진관체제로 바꾸었다.

◆‘국수’급의 바둑 실력

류성룡이 이처럼 전략에 강했던 배경에는 ‘국수’급 바둑 실력이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란해 있을 때 명나라 후원군을 끌고 온 이여송 장군이 어느 날 통역을 통해 바둑을 한 판 두자고 요청해 왔다. 바둑 한 판 두는 것이야 어려울 것이 없었다. 문제는 이여송은 바둑의 고수였으나 선조는 바둑에 맹탕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훈수를 둘 수는 없는 노릇. 여기서 류성룡이 꾀를 냈다.

선조와 이여송은 정원에서 각각 일산(양산)을 받치는 사람을 두고 대국을 시작했다. 류성룡은 일산 받치는 역할을 자청했고 한 곳에 조그만 구멍을 냈다. 임금이 돌을 놓아야 할 자리를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으로 슬쩍 비추려는 것이었다. 이여송이 흑돌을 잡고 좌외변 3·4번 소목에 첫 돌을 놨다. 이에 류성룡은 햇빛 구멍을 바둑판 정중앙인 천원에 향했다. 선조가 수를 두자, 이여송은 그 ‘기개’에 감탄한다. 류성룡은 이날 바둑에서 미리 집 하나하나를 계산해 둘을 승패 없이 ‘비김’으로 끝나게 했다.

류성룡의 바둑 실력과 관련된 일화는 또 있다. 그가 상주 목사로 재직 중일 때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와 점심을 하며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고을에 복잡한 송사가 일어난 데다 조정에 급히 보내야 할 공문을 바로 작성해야 할 일이 한꺼번에 터졌다. 그는 바둑을 그대로 두며 형방을 불러 송사의 판결문을 불러주고, 동시에 조정에 보낼 공문도 구두로 작성해 보내는 3가지 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결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기보는 남아 있는 게 없다.

◆인간 존중 사상이 몸에 밴 사람

류성룡의 정치는 ‘현실’이라는 바탕에 ‘충효’라는 이론과 ‘실용’이라는 방법의 두 기둥을 세우고 ‘개혁’으로 지붕을 덮어 백성을 지키려 한 것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은 백성의 아픔을 통감하며, 이들을 위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내놨다. 특히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당시 조선에서 그는 인재를 등용할 때 철저히 능력으로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나이 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수십 차례 사직서를 제출했고, 형 겸암 류운룡과 한적한 정자에 앉아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 자식들에게는 편지를 보내 올바른 학문과 인생의 먼 길을 걷기를 당부했다. 전해지는 편지에는 “요즘 서울의 소아(젊은이)들은 마치 시장 상인들처럼 다만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것만 취하고 빨리 되는 길을 구하기만 한다. … 유명해지기 위해 다투기를 잘하지 못하는 자들이 본받을 바가 아닌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 봐도 그의 사상과 철학이 어떠했을지 짐작 가는 대목이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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