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트의 탄생-대한민국 브랜드 100년 분투기/유승재/위즈덤하우스/1만7000원
진로, 활명수, 칠성사이다, 미원, 삼양라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친숙한 브랜드다. 길게는 100년을 이어온 이 상표에는 우리의 역사가 그만큼 응축돼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제품 역사를 좇다 보면 브랜드가 품고 있는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탄생한 히트 상품에는 외세에 의한 굴욕적 개항, 제국주의 식민지배, 동족 간 전쟁 등 100여 년 동안 겪었던 부침의 순간들을 반영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브랜드의 역사는 곧 한국의 역사’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신간 ‘히트의 탄생’은 189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탄생한 25가지 히트 제품과 브랜드를 차례로 소개한다. 그리고 제품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은 물론 소비사회의 모습과 변화, 생존을 위한 기업들의 노력과 브랜드 마케팅 등을 들려준다. 역동적 변천사를 거친 브랜드의 역사를 알고 나면 평범하고 익숙한 제품들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봉건사회를 개혁하는 새로운 제도들이 도입되고 다양한 신식 제품들이 들어왔다. 일본과 중국 상인들이 조선 전역을 돌며 상업활동을 펼쳤다. 조선인들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신기한 서구문물들을 접하게 됐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기업들은 국내에 지점 혹은 지사를 설립해 활동했고, 소수이지만 이에 맞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상점이나 기업들도 생겼다. 해방 이후 일제 기업을 이어받거나 순수 민족자본으로 이어간 기업들이 1960∼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며 다양한 제품과 브랜드를 만들어 왔다.
1920년 등장한 화장품 ‘박가분’은 조연으로 시작해 짧지만 불꽃같은 화려한 주인공의 삶을 살다 비극적으로 마감한, 한 편의 영화 같은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비록 20년을 못 채운 채 허무하게 퇴장했지만, 박가분이 우리나라 화장품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다. 최초로 등록된 화장품이자 상표였을 뿐 아니라 차별화된 패키지 디자인을 도입해서 화장품의 공산품 시대를 열기도 했다. 특히 박가분을 만든 박승직상점은 우리나라 최장수 기업인 두산그룹의 출발점이 됐다. 저자는 “외국 브랜드들과 겨루면서 화장품의 대중화를 이끌어낸 공로 역시 인정해야 한다”며 “박가분은 두산그룹의 밑바탕으로, 우리나라 근현대 경제, 기업사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
LG그룹 또한 전 국민에게 값싼 치약을 보급하고자 만든 ‘럭키치약’이 히트하면서 시작됐고, ‘활명수’와 ‘유한양행’은 일제의 억압에 대항해 기업활동을 하면서도 독립운동에 힘썼다. 파괴된 농촌을 살리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한 분식장려정책의 수혜를 받은 ‘삼양라면’도 격동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브랜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브랜드들은 우리 생활과 사회를 그대로 담아내고 투영해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내며 생존했다. 하지만 치열한 마케팅 현장에서 오래 살아남거나 영향력을 남긴 브랜드보다는 소멸한 브랜드가 더 많다. 저자는 “브랜드는 단순한 상품 이름이 아니라 의미와 경험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생명체나 다름없다”며 급변하는 소비자의 욕구, 산업과 기술 환경에 따라 변화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정체돼 사라진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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