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물자법 따라 美 정부가 기업 통제 가능

“45일 안에 귀 회사의 반도체 재고와 주문, 판매 등 공급망 정보를 담은 설문지를 제출하세요.”
한국 삼성전자, 대만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을 상대로 한 미국 행정부의 이같은 요구가 강한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이 정한 제출 시한은 오는 11월 8일로 이제 1개월밖에 안 남았다. 미국이 공언한 대로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발동, 정보의 강제 제출 절차를 밟을지 주목된다.
7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 백악관은 지난달 24일 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과 화상회의를 열었다. 삼성전자가 이같은 형식의 회의에 초청된 것만 벌써 3번째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첫번째 회의와 달리 이번 3차 회의는 지나 러만도 상무장관이 주관했다.
이 자리에서 미 정부 측은 글로벌 기업들한테 반도체 공급망 관련 자료 제공을 요구했다. 구체적으로 “45일 안에 반도체 재고와 주문, 판매 등 공급망 정보를 담은 설문지를 제출하라”고 했다. 그 시한이 오는 11월 8일로 다가왔다.

대상 기업들 사이에선 반발 움직임이 일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기업인 대만 TSMC의 법무담당 책임자 실비아 팡은 “어떻게 대응할지 평가 중”이라면서도 “TSMC는 민감한 정보, 특히 고객 데이터는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만 유나이티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류치퉁 최고재무책임자(CFO)도 블룸버그통신에 “고객사의 비공개 정보를 보호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 정부도 기업들과 같은 입장이다. 대만 경제부는 최근 “우리 반도체 업체들은 고객의 동의 없이 영업비밀과 관련된 정보를 미 정부에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대만이 요즘 중국 전투기의 방공식별구역(ADIZ) 침범 등으로 국가안보상 위기에 직면해 미국의 도움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가운데 이례적으로 미국에 반기를 든 셈이다. 대만의 야당 지도자들 입에선 심지어 “대만은 미국에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블룸버그통신은 한국과 관련해서도 “산업통상자원부가 미국의 자료 요구 범위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우리 언론에 난 기사를 인용해 “한국 반도체 업계 관계자가 ‘미국 측 요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언급했다”고 덧붙였다.
이제 시한이 1개월밖에 안 남은 가운데 미 정부가 공언한 대로 정보 강제 제출 절차에 돌입할지 관심이다. 기업들과 회의 당시 러만도 상무장관은 “미국 정부의 요구는 자발적 정보 제공”이라면서도 ”필요시 자료 제출을 강제하기 위해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발동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DPA는 6·25전쟁 당시 미 정부가 기업들의 군수물자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만든 법률이다.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미 정부에 주요 산업에 대한 직접 통제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최근에도 코로나19 방역물자 및 백신 생산 확대를 위해 이 법률이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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