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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냄새가 왜 거기서 나오니? [박영순의 커피 언어]

입력 : 2021-10-09 19:00:00 수정 : 2021-10-08 18:3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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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통해 커피의 품질을 평가하는 커피테이스터에게 흙냄새(earthy)는 좋은 커피임을 판단하는 지표가 된다

커피테이스팅 자리에서 ‘어시(Earthy)’라는 표현이 나오면, 순간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뉜다. 한 편은 “흙냄새가 왜 거기에서 나오냐”며 마뜩잖다는 반응이고, 다른 쪽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한다.

프랑스의 와인전문가 장 르누아르가 1997년 콜롬비아커피생산자연합회(FNC)의 의뢰를 받아 개발한 아로마키트 ‘르네뒤카페’ 36종 가운데 첫 번째가 흙냄새이다. 흙냄새가 나는 와인이나 커피는 찬사를 받기도 하고 감점을 받기도 한다.

속성 그 자체는 가치가 중립적이지만 농도가 문제를 일으킨다. 다른 향미 속성들을 억누를 정도로 지배적이면 결점으로 취급받는다. 커피 열매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오염됐음을 시인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반면 멋진 연주의 베이스처럼 있는 듯 마는 듯, 그러나 빼 버리면 허전한 정도로 영향을 주고 있다면 커피의 면모를 고급스럽게 만드는 속성으로 대접받는다.

커피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할 때, 무조건 부정적이라 간주하고 인상을 쓰게 되는 것은 SCAA(미국스페셜티커피협회)가 장 르누아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흙냄새를 향미적 결점(Aromatic taints)으로 분류한 탓도 크다.

와인에서 흙냄새는 고급 와인의 매력이기도 하다.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으로 빚어내는 포므롤와인과 토스카나와인, 쉬라즈 품종으로 양조하는 호주의 펜폴즈와인은 은은한 흙냄새가 애호가들에게서 찬사를 받는다. 상면발효한 에일맥주가 풍기는 흙냄새는 차라리 그윽하다. 스카치위스키만이 지닐 수 있는 피트(Peat)향도 흙냄새를 연상시킨다. 발효과정을 거치는 우롱차나 보이차, 홍차에서 타닌(Tannin)이나 테아닌(Theanine), 무기질 등 차 속의 성분들이 발효취와 어우러지면서 그윽한 흙냄새를 발휘한다.

우리가 흙냄새에 친근한 것은 구약성서 창세기의 말씀을 따른다면 인간이 탄생한 기원지이기 때문이겠다. 흙은 자연의 근간이요, 결국 우리가 향하는 종착지가 아닌가? 흙냄새는 우리를 지그시 눈을 감고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대기 중에도 흙냄새가 고루 퍼져 있다. 지구와 달 사이에 개미 한 마리가 차지하는 정도만큼 공기 중에 흙냄새가 존재한다. 커피에서 나는 흙냄새는 대체로 건조과정에서 비롯된다. 열매 또는 씨앗을 바닥에 펴 놓고 말리는 과정에서 흙냄새가 커피 생두로 배어 들어간다.

에티오피아에서는 흙냄새를 좋은 것부터 블랙(Black), 레드(Red), 그레이(Grey) 등 3등급으로 나눠 표현한다. 블랙은 검은빛이 감도는 신선한 토양이고, 레드는 분해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다소 자극적인 냄새가 나며, 그레이는 좋지 않은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진흙을 연상하면 되겠다.

에티오피아 하라, 인도네시아, 아이티의 일부 재배자들은 흙냄새를 내기 위해 파치먼트를 땅에 살짝 짓누른 뒤 물을 축였다가 다시 말린다. 이런 방식을 통해 좋은 흙냄새가 나오기를 소망한다. 흙냄새는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향미이기도 한 것이다. 본성은 착한데 과하면 악취가 되는 흙냄새의 속성은 인간사의 정곡을 찌르는 교훈이 될 만하다. 본디 악한 것은 없다.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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