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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찌 끊고 달아난 성범죄자 마창진도 ‘이것’ 때문에 덜미 [이슈+]

입력 : 2021-09-12 08:00:00 수정 : 2021-09-11 23: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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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간 도주한 마창진, 특유 팔자걸음으로 덜미
걸음걸이 분석해 범인 가려내는 ‘법보행분석’
범인 특정하긴 어렵지만 수사범위 좁히는 데 유용
국책사업으로 법보행분석 프로그램 연구개발 중
gettyimagesbank 제공

#. A씨는 지난해 9∼10월 3차례 성폭력 범죄를 저질렀다. 새벽 시간에 귀가하는 불특정 여성들이 범행 대상이었다. A씨는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진술을 거부하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로 버텼다. 자신이 찍힌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고도 화질이 좋지 않아 모른다고 변명으로 일관했다. A씨는 경찰이 CCTV 영상을 ‘법보행(法步行) 분석’ 의뢰한 후 추가 증거를 제시하자 그제야 자신의 범죄를 인정했다.

 

걸음걸이로 범인을 가려낼 수 있을까. 지난 6일 전남 장흥에서 전자발찌를 끊고 달아나 공개 수배된 성범죄자 마창진(50)은 그 특유의 팔자걸음을 알아본 경찰에 붙잡혔다. 걸음걸이가 마창진의 16일 동안 이어진 도주를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경찰은 대다수 범죄에서 유전자(DNA) 정보나 지문을 확인하고 얼굴을 포착해 범인을 잡는다. 하지만 범행현장의 정보가 제한적이고 마스크 등의 은폐로 범인을 식별하기 어려울 때 다른 방법을 수사에 활용하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걸음걸이의 특성을 분석해 동일인 여부를 가려내는 과학수사 기법인 ‘법보행분석’(Forensic Gait Analysis)이다.

 

11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경찰청이 의뢰한 법보행분석은 총 20건이다. 2019년 22건, 2018년 17건 등 최근 몇 년간 매년 20건 안팎의 법보행분석이 이뤄졌다. 법보행분석이 도입되고 많게는 한 해 42건(2015년)까지 수사에 활용되기도 했다. 경찰청은 수사 시 법보행분석이 필요한 경우 일선 경찰의 의뢰를 받아 의학·공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법보행분석 전문가 협의체’에 검증을 맡긴다.

 

법보행은 DNA 정보나 지문처럼 개인을 식별하는 증거는 아니지만 범인이 아닌 사람을 가려내는 등 수사범위를 좁히는 데 유용하다. 

 

‘법보행분석 전문가 협의체’ 초대회장을 지낸 윤영필 대전본병원 대표원장은 “걸음걸이는 골반과 무릎, 발의 형태, 특정한 근육 질환, 신경 문제 등이 반영돼 나타난다”며 “단순히 팔자보행으로만 특정하는 게 아니라 오른쪽만 팔자걸음인지, 무릎 모양이 X자인지 O자인지 등 복합적으로 분석해 확률적으로 범인인지 아닌지를 구별한다”고 말했다.

 

gettyimagesbank 제공

법보행분석을 수월하게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윤 원장은 “분석 대상이 최소한 3보장(걸음) 이상 걸어야 하고 정면에서 걸음걸이를 보는 게 가장 좋다”면서도 “정면을 보여주는 CCTV 영상은 별로 없고 제한된 정보를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영상의 정보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의학과 공학적 분석이 함께 이뤄진다. 윤 원장은 “공학 전문가가 주변의 사물을 보고 공학적으로 재구성해 보폭의 차이를 측정하는 등 비교분석이 진행된다”며 “보도블록의 방향과 발의 모양을 비교하면 발의 방향이 더 명확하게 보인다”고 했다.

 

법보행분석이 범죄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도 한다. 2016년 대구고법은 2015년 발생한 ‘대구 금호강 살인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법보행분석 등을 근거로 박모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보험금을 노린 박씨가 친구 윤모씨를 살해한 사건인데, 법보행분석이 처음으로 법정에서 유죄 증거로 인정된 첫 사례다.

 

당시 경찰은 CCTV를 통해 용의자를 확인했지만 두꺼운 패딩과 후드를 쓰고 있어 얼굴을 식별하기 어려웠다. 그의 독특한 걸음걸이를 알아본 피해자의 지인들이 범인을 특정했고 경찰은 ‘법보행분석 전문가 협의체’에 자문했다. 그 결과 내반슬(O자 다리), 외족지 보행(팔자걸음), 원회전 보행(다리가 휘어지며 걷는 걸음)을 보인 범인의 걸음걸이와 박씨의 걸음걸이가 일치한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고 법원은 이를 증거로 인정했다. 

 

경찰청. 연합뉴스

법보행분석이 거짓말탐지기처럼 보조적 수사 기법이기는 하지만 갈수록 지능화하는 범죄에 대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란 평가도 있다. 특히 전국에 400만대 이상의 CCTV와 500만대가량의 블랙박스 등 많은 영상정보처리기기가 설치된 한국에서 활용 가능성은 더욱 높다.

 

경찰청 관계자는 “현재 법보행분석은 하나의 수사기법으로 제한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연구개발사업(R&D)으로 한국인 법보행 데이터를 구축하고 공학적 법보행분석 프로그램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찰청은 치안과학기술연구개발사업 중 하나로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18억원을 들여 ‘CCTV 영상 검색 고도화 및 신원확인기술 개발’을 진행했다. 이를 담당한 중앙대와 서울대 연구팀은 CCTV 영상을 이용한 수사력 제고를 목표로 △영상 검색의 고도화 △공학적·의학적 법보행 분석 기법을 이용한 신원확인 기술 개발 △대표 인구 집단의 보행 패턴 분석 및 인구학적 조사 등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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