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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담은 몸짓… “내 작품은 신체와 평면·재료가 만난 현상”

입력 : 2021-09-09 19:37:50 수정 : 2021-09-09 19: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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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여는 ‘실험 미술 거장’ 이건용 화백

캔버스를 등지거나 옆에 세워두고 서서
양팔 휘둘러 어깨 움직이는 만큼 선 그어
붓은 손끝에 붙어있는 연장된 신체 일부
때론 깁스 한 것 처럼 팔 움직임 통제도

1976년 처음으로 ‘신체드로잉’ 선보여
이야기나 주제가 아닌 ‘방식의 그림’
2022년 뉴욕서 ‘한국의 실험 미술전’ 앞둬
“세계 유수 뮤지엄에 작품 100점 채울 것”
이건용 화백이 1980년 벌인 퍼포먼스 ‘달팽이 걸음’(Snail’s Gallop)

운동화에 청바지, 티셔츠 차림에 팔을 하늘로 쭉 뻗은 그에게 사정없이 물감이 튄다. 물감을 뒤집어쓰면서도 붓질은 멈춤 없이 계속된다. 물감을 흠뻑 머금은 붓을 들고 일정한 속도, 일정한 범위 안에서, 반복해 선을 긋는다.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딛고 사방으로 팔을 쭉 뻗어 움직이는 그의 작업 뒷모습은 분명 청년의 뒷모습이다. 올해 팔순의 이건용이다.

한국 실험미술의 거장, 신체드로잉 창시자로 불리는 이건용 화백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최근 시작됐다. 전시 제목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이건용의 동의어, ‘바디스케이프(Bodyscape)’다. ‘신체’와 ‘풍경’의 조합이다.

전시에서는 1976년 처음 ‘바디스케이프’(신체드로잉)를 선보인 이래 계속되고 있는 연작의 신작 회화 34점을, 갤러리현대 두가헌에서는 아크릴 물감, 연필, 색연필 등 다양한 재료로 완성한 종이 드로잉과 판화 작품을 선보인다.

신체드로잉은 대부분 캔버스를 보지 않고 그리는 그림이다. 캔버스를 세워두고 그 뒤로 가거나, 캔버스를 등지거나, 캔버스를 옆에 둔다. 캔버스 뒤에서는 팔을 뻗어 손목이 움직이는 범위만큼 선을 긋고, 캔버스를 등지고 서서 양팔을 휘둘러 어깨가 움직이는 범위만큼 선을 긋는다. 캔버스 옆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은 그린 방식별로 명명된다. 그가 화면의 뒤로 가면 ‘76-1’, 화면을 등지면 ‘76-2’, 화면을 옆에 놓으면 ‘76-3’이다. 76은 화가가 신체드로잉을 처음 선보인 해를 뜻한다. 양팔을 휘두른 연작은 마치 사람 뒤에 날개가 그려진 것 같은 형상이 되기도 하고, 캔버스 옆에서 한 팔을 휘저은 연작은 하트 모양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사를 그린 것이 아니나 그림은 일명 ‘천사 그림’이라 불리고, 하트를 그린 것이 아니나 ‘하트 그림’이란 별칭이 붙는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자신의 회화를 두고 ‘그린 것’이라기보다 “내 신체와 평면과 재료가 만난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건용은 캔버스 안에서 무슨 대상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를 세상의 일부로 놓고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고민한다. 자신의 신체 중 어디를 축으로 어느 관절의 움직임 만큼 선을 그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붓은 손에 쥔 도구가 아니라, 단지 오른손 끝에 붙어 연장된 신체의 일부로 보인다. 때로는 깁스를 한 것처럼 팔에 부목을 대고 팔이 구부러지는 것을 통제해 어깨와 손목의 움직임만 허락하기도 한다. 군부독재 시절의 사회통제를 은유한 것이다. 그는 “그 시대가 부자연스러운 시대였지. 내가 일부러 자신을 통제해서 어떤 선이 나오는지 봤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회화 전체를 관통하는 점은 이야기나 주제보다는 방식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감성보다 논리다. 전시장 한쪽, 바닥에 눕혀 놓은 캔버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팔로 곡선을 그리는 작품 ‘76-8’ 제작 과정 영상이 나오던 중이었다. 갤러리 관계자가 “무릎을 축으로 반원을 그리는 모습”이라고 설명하자 옆에 있던 그는 “어깨를 축으로”라고 정정했다.

이건용은 청년 화가 시절인 1970년대, 한국 미술사에 남은 미술학회 ST그룹을 조직하고 아방가르드협회에서 활동했다. 45년 전부터 회화에 줄기차게 ‘논리’를 구현하고자 집착한 이유는 뭘까. 그의 삶을 추적하다 보면, 성장 배경, 사상, 미학적 지향점을 모두 제쳐두고 가장 가슴에 남는 의외의 사연이 등장한다. 2016년 류한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와의 인터뷰 때 1970년대 행위예술 ‘이벤트-로지컬(event-logical)’을 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꺼낸다.

“한국전쟁, 4·19, 5·16 등이 일어나고, 이후 모든 것을 근대화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정서에는,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또 그런 관계에서 상호 협조하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어요. 단지 감정만 앞설 뿐이었지요. 당시에는 골목마다 싸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의 눈을 3초만 봐도 싸움이 벌어질 정도였어요. 서로 쳐다본다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느끼는 시대였습니다.”

이건용의 눈에 비친 사회는 근대를 넘어 탈근대를 이야기하면서도 퇴보하는 듯한 오늘날 삶의 현주소, ‘혐오 사회’, ‘분노 사회’ 풍경과 겹친다.

그는 이어 말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당대의 처방으로서 ‘논리’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건이 논리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에요. 또 논리적일 때는 사건이 안 일어나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관념주의 철학과 형이상학 철학을 ‘로직’을 통해 치료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어요. 저는 그것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건용 화백이 작품 ‘76-4’를 제작 중인 모습. 갤러리현대 제공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던 이건용은 신체드로잉을 시작했을 때 재료비가 없어 매직을 사용했고, 그 작품을 1979년 리스본국제전에 출품해 대상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작품은 요즘 미술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다.

가난했지만 그의 집에는 부친이 수집한 장서 1만권이 있었다고 한다. 책을 놓을 곳이 없어 4권을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탑처럼 책을 쌓은 기둥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책을 꺼낼 때 아들들을 불러 “얘들아 기둥 잡아라”라고 했다. 철학, 문학, 종교 서적들이 대부분이었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과 같은 책들도 있었다. 책에 파묻혀 살던 소년은 중고교 시절,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한 선생님이 수업시간 짤막하게 흘려 말하는 서양 현대철학에 호기심을 가졌고, 수업을 몰래 빠지고 독일문화원, 프랑스문화원, 인근 대학교에서 열리는 철학학회에 아버지 옷을 입고 찾아갔다. 2차 대전 이후 분출한 사상의 흐름을 좇아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듣고 싶어했고, 현상학, 분석철학을 논하는 곳에 찾아갔다고 한다.

“다 이해하진 못했겠지. 그래도 이 사람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 궁금했어.”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말했다.

결국 의사가 되라는 어머니의 바람을 저버리고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소년 철학자는 군부독재 시절 한국 전위미술을 이끌었고, 2022년 세계 현대미술의 심장부라 불리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아방가르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전 참여를 앞두고 있다.

이건용에게도 허리가 굽고 어깨가 들리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아직은 끄떡없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지만, 붓질은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캔버스에 그려진 허리 굽은 한 노장의 신체 풍경도 그 시대, 그 나이, 그 순간을 산 이건용이 남기는 유일무이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깊은 사유를 품속에 숨기고, 활기차게 몸짓하고 아이처럼 잘 웃는 그가 말했다.

“세계 유수의 뮤지엄에 내 팔을 휘둘러 100호짜리 하트 100점을 걸어 채울 거다. 앤디워홀이 살아있다면 울고 갈 껄!”

다음달 3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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